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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맘대로 아무거나 시크하게 쓰기

<요즘 세상에 누가 시를 읽나?>

<요즘 세상에 누가 시를 읽나?>

 

 

 요즘 세상에 누가 시를 읽나?

 

 긴 글을 읽기가 싫어 시집을 몇 권 빌려왔다.

 

 

 -최영미 시집을 읽고

 

  예전 그녀의 시집에서 생각나는 것은 '컴퓨터와 씹하고 싶다'는 부분이다.

 그때 나의 상황도 그랬다.  한창 나우누리 며 하이텔이 유행하던 시절. 

 나는 씹하고 싶은 한국 남자가 없어 차라리 컴퓨터와 씹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그 시를 읽었었다.

 최근 트윗에 들어갔더니, '한남충'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그녀들이 왜 그런 단어를 쓰는 지 공감이 되었다.

 

 2005년도와 2009년도의 그녀의 시집을 읽으면서, 시는 은유인데 그녀의 은유는 지나치게 주관적인 은유에 머물러 예전처럼 보편적 공감을 주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정희 시집을 읽고

 

 첫 장을 펼쳐 읽으려다가 지나치게 긴 글에 질리고 말았다.

 요즘도 누가 시를 읽을까?

 

 하지만 그녀의 삶은 시사하는 바가 큰데, 그녀는 46살이든 1991년 뱀사골 산행 중 실족해서 사망했다.

 당시 그녀의 행적을 보면, 호주제폐지 등이 포함되었을 법한 여성법률개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최근 트윗에 들어갔더니, 여성신문의 활동이 활발하던데, 이 여성신문의 창간자에 그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녀의 인생을 보면, 신학 대학을 나오고 그 이전에도 기독교 관련 활동이 많은 것으로 보아, 그녀가 적어도 사회적으로 성공하는데는 종교적 도움을 받았을 법하다.

 나도 어린시절 교회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 다녔으면, 그 혜택을 조금쯤 입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여성운동의 어려움을 감지한다.

 

 

--2018년 현재도 여성 운동은 여전히 어렵다.

 

  여성의 권익이 향상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여성 인력을 저렴하게 이용하려는 사회의 교활함에 힘입어 있기에

 오히려 여성들이 기득권을 갖고 있던 곳에서는 밀려남을 절감하게 되는데, 여성 작가와 여성 요리사, 여성 드라마 등 기존 여성이

기득권이 되어 있던 곳에서는 경제력이 주어지니까, 여성을 밀어내고 남성으로 대체되는 현상을 보게 되니 착잡하다.

 

  우리사회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어떤 원, 보이지 않는 장벽 하에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보이지 않는 장벽을 뚫고 나와 선두하는 여성은 차단되고 학살된다.

 

   고정희라는 한 여성이 기독교라는 보이지 않는 보호막을 뚫고 여성의 권익을 주장하게 되자 살해(?)당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다.

   최영미라는 한 여성이 가족이라는 보호막을 뚫고 나와 자유를 누리고자 할 때도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여성 운동이 어려울까?

 

  여성은 그 조건이 천차만별이며, 그 조건들이 여성의 단합을 막거나 억압하게 된다.

  인간의 성욕은 기본권인데, 여성이 이 성욕을 만족하게 되는 순간부터 여성 억압적 사회에서 벗어나기가 요원해진다.

  그리고 이 성욕을 포기하고 삶을 산다면, 그녀는 2세를 생산하지 않으므로, 그녀 선에서 여성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큰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원을 벗어나지 않는 자유나 운동은 허용하지만,

 그 원을 깨뜨리고 보다 진전된 여성 운동을 하기 시작하면, 그 개인 및 단체를 기득권층에서 차단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런 여러 생각들을, 시를 읽을 수 없는 나 자신(아마도 원래 시를 좋아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으나)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았다.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여성 운동?

 

 

   여성의 운동을 지지하고, 여성과 관련된 것들을 소비하는 것이다. 

 

  여성이 만든 만화, 영화, 드라마, 책 등 이왕이면 남성이 아닌 여성이 생산한 것을 사주는 것이다.

 

  또, 되도록 여성은 비난하지 말고 한번쯤 그녀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더불어 여성 정치인에게 투표하고 밀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