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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느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관하여, 인간관계란 무엇인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주제를 하나로 요약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성 마저 상실한 인간의 표본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사를 가다가 이상한 터널로 들어서는 치히로의 부모와 치히로.  그곳은 폐허가 된 테마파크로 거품 경제가 몰락한 곳의 표상이다.  알 수 없는 진수성찬이 차려진 그 곳에서 치히로의 부모는 마구 먹다가 돼지가 된다.  먹어도 되는 음식인 지, 누구를 위하여 차려진 음식인 지 조차 모른 채, 자신들이 지불할 능력이 된다고 마구 먹는 그 부모는, 타인의 처지를 고려하는 '인'이나 '예'라는 인간성 지표를 상실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다."

 

   나라들의 행복지수를 비교해 보면, 경제적인 것이 행복을 완전히 규정하지 않는다.  (물론 어느 정도 규정하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지만.)  우리나라가 127개국(?) 중 63위에 오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불행의 원인은 비교에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만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런 생각들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다.  가끔 나도 여행지나 맛집을 올리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참고가 되라는 의미이지, 나 당신들보다 이렇게 잘 먹고 잘 산다를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다.  하지만 가끔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그 포스팅을 보면서 꽤 불행해 질 수도 있겠다.  세계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가끔 부러워지는 나를 보면 말이다. 

   아울러 마구 먹는 나 자신이 가끔 돼지가 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떠올릴 때가 있다.  음,,,  내가 예를 갖추지 않고 자본주의적인 표본이 되어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나?  그런 생각 떠올려 봤다.  비록 내가 먹을 능력이 충분히 된다고 해도 먹는 걸 좀 자제할 필요가 있겠다.  예전엔 내가 입는 것 안 입고 다른 것 안하고 좋아하는 것 한다는데 뭐가 문제가 되나? 이런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다.  다만, 표현 안하면 된다.  근데 또 나란 인간이 표현을 안 하지는 못하는 성격이라서, 차라리 먹는 걸 자제하는 게 낫겠다.  

  

  두 번째 얘기는 이름을 잃는 것에 대한 것이다.  "센과 치히로는 동일 인물이다.  그런데 그 터널 속 세상의 온천장에서 일하게 되는 치히로는 온천장 주인 아바바에게 '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된다.  센은 숫자 1000이라는 뜻이므로, 아무 의미 없는 번호와 같다.  '알 수 없는 깊이(천 길 깊이)' 라는 뜻을 지닌 치히로의 이름은, 그 가운데 '히'라는 글자만 따 단지 '천'이라는 숫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름을 불러 주고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나의 개성과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라는 (드문) 여자 철학자에 의하면, 인간은 타인과의 의미 있는 관계에 의해 인간이 된다.  따라서 타인과 아무런 관계 없이 사적이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은 동물에 불과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관계는 있다.  하지만 그 관계가 사적이익에 용이하고 이득이 될 때만 존재하는 것이다.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극대화 되는 사적이익이 없다면 그 관계도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다른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거나 불러준 적이 별로 없는 거 같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들이 자기를 대해 주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타인을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관심을 갖고 뭔가를 해준다는 것은 반드시 댓가를 요구한다.  내가 타인에게 그런 걸 요구하지 않는데 왜 관심을 가져야 하지? 

  즉, 그런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관계가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돈을 벌려고 직업을 선택했다.  즉, 직업 선택시 돈과 안정성을 우선시한 것이다.  그런데 왜 나에게 자꾸 다른 것까지 요구하지? 

그런 의문이 들었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이어서인가 보다.  그냥 돈을 다루거나 사물을 다루는 직업이었으면, 일하고 돈 받으면 그만인 것이다.  다만 직장 동료간의 인간관계가 문제일 것인데, 그래서 사람들이 직장생활 중 인간관계를 가장 힘들어 하나 보다.

    참 세상이 이상하구나, 이런 생각했다.  왜 다들 나보다 이기적이면서 계속 나에게만 공격을 하고 그러지?  내가 지들보다 못한 게 뭐라서?  단지 사적이익을 위해 '척'하는 존재들인 주제에.  이런 생각 말이다. 

 

   그런데, 얻은 결론은, 나라는 인간이 철저히 자본주의적으로만 사고하고 경제적으로만 행동한 것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간은 이성이 있어 인간이기도 하지만, 분명 감정적인 존재다.  그 감정이 상했을 때 앞에서는 웃지만 뒤로 공격하는 유형도 있고, 그냥 앞에서 표현하는 유형도 있다.  인간은 감정에 따라 표현하는 방식이 다양한 사람들이다.  그것은 양육 방식에 따라 결정되기도 하고, 타고 나기도 한다.  따라서,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감정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그 방식이 어쩌면 그 사람의 성격인 지도 모른다.  

 

   그럼 나란 존재에 대해 규명해 보자.  

   난 tv에 나오는 세 쌍둥이를 보면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참 다르구나, 이런 생각했다.  일란성 쌍둥이인데도 먹는 방식을 보면 아주 많이 다르다.  자기 것 빨리 먹고 남의 것을 빼어 먹는 아이가 있고, 자기 것을 지키며 천천히 자기 것은 다 먹는 아이가 있고, 내 것이 뺏기든 말든 '히히' 미소 지으며 웃는 아이가 있다.  가장 이뻐 보이고 잘 생긴 아이는 이 마지막 아이다. 

 

   그러면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저 마지막 아이는 뺏기고도 미소 짓는 인간성 때문에 이뻐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예쁘기 때문에 내 걸 안 챙겨도 부모가 알아서 가장 사랑해 주고 이뻐하기 때문에 저런 인간성이 된 것일까?  이런 의문 말이다.  나는 둘 다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고 나는 것과 양육되는 것. 

 

  늘 나는 나란 존재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사람들은 그래서 나를 어리다고 하나 보다.  난 사실 세상과 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동물에 가깝달까?  연대를 통한 사적이익에 별 관심이 없다. (이제는 그 이득을 좀 추구하고자 한다.  왜냐?  나에게 이득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돈 뿐만 아니라 애정, 존경의 욕구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경제적으로도 사회가 변해서 더이상 내가 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아마 그 연대가 내 개인에게 별 이득이 안된다고 판단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나란 인간은 철저히 경제적인 피를 타고 났기 때문에.  아니면 그냥 체질적으로 다른 의도가 껴 드는 것을 싫어한다.  이것은 완벽주의적 사고와도 연관이 될 것이다. 

  물론 눈치 보기 싫은 이기성과도 연관이 될 것이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타인에게 어떤 이득을 바라는 행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이득을 노리지 않는데 왜 내가 눈치를 봐야 하지?  이런 생각 말이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이득 없이도 눈치를 봐야 하고, 그것이 바로 배려다.  그럼 왜 나는 그 배려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살다 보니, 배려 하는 척하며 뒤통수 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많지 않았어도, 그 부분만 유달리 보이는 나의 부정적 사고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양육되었기 때문이지만 이제는 좀 고쳐야 하겠다.) 

  

  오늘의 배려가 어떤 다른 큰 이득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그 배려를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배려 받은 적 없는, 또는 어긋난 그 배려로 인해 내 삶이 틀어졌는데 왜 내가 배려해야 하지?  이런 의문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공부 많이 한 사람을 아주 많이 배려해준다.  그래서 공부만 하면 세상 모든 일에서 열외다. 

  그런데 사회에 나오면 그 배려가 선점을 하는데는 유리하지만 그 외는 도움이 안된다.  도대체 왜 나를 배려해 줘 가지고 이렇게 인생을 망가뜨리는가?  이런 생각 들게 된다.  왜 사회는 부정부패, 불공정성으로 가득한 데 그걸 늦게 깨닫게 해줘서 이 모양 요 꼴로 살 게 하는가 말이다.  학교나 집에서는 공부면 다 일 거 같은 착각을 심어주고, 사회에 나오면 잘난 놈들에게 하는 배려 (아부)가 돈이 되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놓고 사람을 힘들게 하는가 하는 생각 말이다.  그래, 내가 니들을 배려하면 '나'가 아니다.  이런 맘을 갖게 된 것이다.  쓸데없이 위악적이 되는 것이지.  나는 위 아래 모든 사람 (물론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지만)을 배려하고 살 순 없다.  그럴 능력은 부족해.  이게 이전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많은 배려를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닭살이 돋지만, 조금쯤 배려를 하고 살고, 다른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인식하며 살고자 한다.     

 

   난 태어나면서부터 목표 지향적이고 경제적인 마인드를 가졌다.  내 피에서 느껴진달까?  요즘 아이들이야 1-2명 태어나니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형제가 많은 가정은 태어나면서부터 경쟁에 시달려야 한다.  다만 자본주의 하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가끔 세상 사람들이 형제를 많이 낳아야 혼자만 아는 아이로 자라지 않는다, 이런 말 하는데, 난 아니라고 본다.  형제가 많다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아직 채 자라기도 전에 내 것을 뺏기는 체제인 것이다.  더 경쟁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다만 그 부모의 양육방식이 사랑으로 모든 아이를 차별하지 않고 감싸 안는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태어나면서부터 경쟁 체제에 돌입하고 둘째는 경쟁적인 사고를 갖게 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나는 대부분의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잘 키운다고 해도, 형제를 차별하는 본능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부모도 감정을 지닌 동물이고, 자기 맘에 들거나 자기와 유전자가 가까운 아이를 본능적으로 조금은 이뻐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리하여 나란 인간은 어려서부터 그렇게 태어난 데다, 어느 순간 부모 맘에 들게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내가 이쁨 받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그래서 봤더니, 공부를 잘하면 이쁨을 받겠더라고.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던 거 같다.  또 나를 믿어 주는 부모를 배신하면 안되겠기에 도서관에 가면 꼭 공부를 해야겠더라고.  게다가 딴 짓 할 돈도 없고. 

 

   인간관계?  소위 친구를 만나려 해도 돈 없이는 힘든 법이거든.  하다 못해 돈이 없다면, 맛있는 음식을 해주는 엄마의 지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 또한 돈과 연결되므로, 나는 어려서부터 인간관계보다는 공부가 재밌다, 라는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경쟁적이지 않은 성격이 있다면 모르겠으나 나는 그런 성격으로 타고 나지 않았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저절로 비교가 되는 일이다.  즉, 쟤는 유치원을 다니는데 나는 그것을 못 다닌다.  쟤네는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데 나는 갈 수 없다.  아무리 자유로우려 해도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그것이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관계인 것이다.-예전 인식).  그것은 오랫동안 형성된 것이라, 지금도 그러하다. 

 

  수학을 잘하는 걸 타고난 터라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을 거 같다.  도대체 인간이란 존재는 변수가 많아도 너무 많다.  그에 비해 공부는 그냥 앎 자체에 승부가 있고, 정직하게 내가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어 좋다.  다만, 공부를 결과에 연연하며 하게 되면, 승부욕이 생겨 더욱 더 경쟁적으로 된다.  공부의 단점이 그것이다.  공부를 하는 한 결코 결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아는 즐거움을 또 무시할 수 없다.

  

  좌우간 인간은 그런 다양성을 가지니까 재밌기도 한 존재다.  난 여자로 태어났으나 여자의 마음은 알다 가도 모르겠다.  즉, 다르다.  너무 다르니 내가 눈치를 봐서 타인의 마음을 짐작해본댔자 실패만 하기 마련이다.  난 타인의 마음을 짚는 재주가 없다.  그러므로 더 힘들고, 하기 싫어지는 것이다.  관계의 중요성을 읊는 여자 철학자를 보면서도, 역시 나와는 좀 다른 생각을 하는 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어느 연구소에서 연구를 했는데 (이런 연구는 대부분 외국에서 한다.)  "사람들은 10대 때 가장 행복하다가 20대가 되면 그 행복감이 약간 떨어지고, 30, 40대까지 떨어지다가 50대에 약간 상승하기 시작하여 60대가 가장 행복하단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했다면, 상당히 다르겠지만.)

 

  그럼 인간이 인간관계를 많이 맺는다고 행복해진다는 건 아님을 알 수 있겠다.  60대는 인간관계가 줄어 들어 점점 외로워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의 인간관계는 진정한 인간관계가 아닐 지도 모른다.   

  즉, 여기서의 인간관계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간관계와 다르다.  그것은 사적이익을 기반으로 한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사적이익이 없으면 사라지는 인간관계이다.  따라서 차라리 인간관계를 안하느니만 못한 관계다.  따라서 '척'하는 사람들의 인간관계는 '척' 안하느니만 못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정말 살벌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직장 다닐 때 간이라도 빼 줄 관계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직장을 관두자 바로 '쌩 까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이것이 바로 사적이익을 바라는 연대의 본모습이다. 

 그러므로 60대가 될수록 행복해지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적이익의 극대화든 아니든 인간관계를 안 할 수 없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서 또 그 인간관계에는 사적이익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배려는 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척'을 할 필요는 없겠으나 타인에 대한 배려를 위해,  때로 표현(말)을 자제할 필요는 있을 거 같다.  인간은 또 누구나 서로 비교하는 존재이며, 저절로 그렇게 되니까.   나는 순수하게 한 말이라도 그것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상당히 부러울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매슬로우라는 심리학자를 또 등장시켜 보자.  그는 사람이 피라미드 구조의 단계별 욕구를 가지는데, 그 하위 단계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으면 윗 단계의 욕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은 이 욕구, 저 욕구 왔다 갔다 하며, 생리적 욕구라는 것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범주가 넓어진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의 욕구 단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그가 본 최하위 욕구는, 생리적 욕구다.  즉, 식욕, 수면욕, 성욕 등 본능적인 욕구를 말한다.

  두 번째 단계는,  안전의 욕구다.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욕구다.

  세 번째로는, 사랑의 욕구다.  사랑 받고 사랑 하고자 하는 욕구 말이다.

  네 번째가, 존경의 욕구다.  인정 받고, 성공하거나 타인으로부터 우러름을 받고자 하는 욕구 말이다.

  다섯 번째는, 자아실현의 욕구다.  지적인 성취나 희망, 목표를 지니고 그걸 이루려는 욕구 말이다.

 

  당신은 이 중 어느 욕구를 추구하고 있는가? 

  (나는 동시에 여러 욕구를 추구한다.  욕심이 많아서^^;;)

 

  "미국에서 하버드생과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행복에 대해 20년 이상의 추적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그 연구자 중에도 이미 생사를 달리 한 사람들이 있을 정도의 긴 연구이다.  그런데 이 연구 설문지에서 처음으로 묻는 질문이 "아침에 눈을 뜨면, 당신을 설레게 하는 일이 있습니까?" 이다.  이 질문은 '설렌다는 것이 행복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설렌다는 것,,,

 

   물론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가 보장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그 사람을 화나게 하는 일이 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는 대체로 만족되었다는 전제 하에 이 질문을 던져 보고자 한다. 

   더불어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도 가끔 설레는 대상이 될 수 있으니까.

 

    "당신은 오늘 아침 설레고 있나요?"  

  '그렇다' 이면 당신은 지금 행복한 것일 지도 모른다. 

    때로 이 사회에서 비교로 인해 불행해 지더라도 말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