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책
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 노진선 옮김 / 솟을북
--들어가며
진정한 영적 탐색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질서정연한 노력의 산물이다.
--제1부 이탈리아
"아기를 갖는다는 건 네 얼굴에 문신을 하는 것과 같아. 일을 저지르기 전에 네가 정말 이걸 원한다는 확신이 필요해."
대부분의 이유들은 내 탓이기도 하지만, 우리 문제의 상당부분은 또한 그의 탓이기도 하다. ... 두 개의 투표권, 구 개의 의견, 서로 충돌하는 두 개의 결정, 욕망, 한계.
신은 교리 속 혹은 하늘 저 먼 곳의 왕좌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워 바로 우리의 심장을 통해 호흡할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들만 보면 언제나 숨막히는 흥분감을 느꼈다.
마침내 난 아무런 희망도 없고, 생사가 달린 절망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고, 그런 상태에 처한 사람들은 가끔씩 신의 도움을 구하기도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 기도는 제발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주세요, 라는 단순한 간청으로 좁혀졌고, 나는 그 말을 반복했다.
진정한 지혜란 바로 그 순간에 유일하게 가능한 해답만을 주며 그날 밤, 유일하게 가능한 해답은 침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침대로 돌아가, 지금 당장 네가 할 수 있는 건 해답을 알게 될 때까지 휴식을 취하고, 자신을 잘 돌보는 일이니까.
그 후로 매우 힘든 일곱 달을 보낸 뒤, 나는 남편과 헤어졌다.
"누군가를 정말로 알고 싶다면, 그와 이혼해봐야 해." 그러나 내 경험은 이와 반대다. 나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누군가를 정말로 알 수 없게 되고 싶다면 그 사람과 이혼해야 한다.
신이 당신의 눈앞에서 문을 쾅하고 닫을 때는 반드시 걸스카우트 쿠키 상자 (혹은 뭐가 됐든지 간에)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나만의 침실을 갖는 건 내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넌 뭘 하고 싶니, 리즈?"
요가 수업을 듣고 싶어.
이 파티에서 빨리 빠져나가 집에 가서 소설을 읽고 싶어.
나에게 새로운 필통을 사주고 싶어.
그런데 매번 이 이상한 대답이 꼭 끼어들었다.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싶어.
하지만 왜 모든 일에 꼭 실용적 가치가 있어야 한단 말인가? 난 수년간 근면한 일개미로 살았다.
... 인생에는 오로지 의무밖에 없단 말인가? 슬픔의 암흑기에 처한 내게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것만이 지금 당장 즐거움을 가져다 줄 유일한 활동이라는 이유 외에 달리 무슨 이유가 필요하단 말인가.
바르치니의 말에 의하면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이탈리아인들은 눈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한 장군, 대통령, 독재자, 교수, 공무원, 언론인, 사업가들은 참아주지만, 결코 무능한 '성악가, 발레리나, 창부, 배우, 영화감독, 요리사, 재단사'는 참지 못한다. 무질서와 악재와 기만의 세상에서 때로는 아름다움만이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덕목이기도 하다. 오직 예술적 탁월함만이 타락하지 않는다. 쾌락은 결코 흥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한 끼의 식사만이 유일한 가치로 통용된다.
내 자신과 오랫동안 핍박받아온 시칠리아 사람들을 비교한다는 건 시칠리아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내 인생의 비극은 개인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고, 대부분 나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지, 서사적인 억압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겪은 것은 이혼과 우울함이지 몇세기간의 피묻은 폭정이 아니다. 나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지만, 내게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재정적, 예술적, 감정적) 자원이 있었다.
우리는 삶을 부여받았고, 이 생애에서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뭔가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인간으로서의 권리)이다.
백 퍼센트 무해한 쾌락을 즐김으로써 내 자신을 다시 긁어모아 훨씬 온전한 누군가로 만들어놓았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다. 이를 가장 쉽고, 가장 근본적으로 표현하자면 난 몸무게가 늘었다.
-- 제2부. 인도
요가는 합일. .. 고대 인도인들이 이 운동을 개발한 이유는 명상을 시작하기 전에 근육과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요가는 인간이 자기 내면의 신을 경험하려는, 아울러 그 경험을 영원히 지속시키려는 노력이다.
명상은 요가의 닻이자 날개다. 명상은 수단이다. 명상과 기도 모두 신과의 교류를 추구하는 수행이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기도가 신에게 말하는 것인 반면, 명상은 듣는 행위라고 한다.
인간은 생각의 산물이다. 감정은 생각의 노예고, 인간은 감정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구루는 자신에게 절대 무너질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번 무너져 버리면 그것이 습성이 되어 자꾸, 자꾸 반복해서 무너지기 때문이다. 대신 씩씩한 마음을 유지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신체적으로 혹독하다. 일단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불편해서 미칠 지경이라 해도 몸을 움직이는 것은 금물이다. ...중략....
비파사나 명상은 살면서 슬픔과 성가심은 피할 수 없지만 스스로를 고요함 속에 오래 묻어둘 수 있다면, 시간이 흐른 뒤, 모든 것 (불편한 것이든, 사랑스러운 것이든)이 결국은 지나간다는 진리를 경험하게 될 거라고 가르친다.
신앙은 확신없는 근면함이다.
이탈리아에서 오래된 재미난 이야기가 하나 있다. 한 가난한 남자가 매일 성당에 가서 위대한 성인 앞에서 기도하며 애걸했다.
"성자님. 제발, 제발, 제발--- 복권에 당첨되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이 탄원은 몇 달간 계속되었다. 마침내 격분한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며, 가난한 남자를 내려다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들아. 제발, 제발, 제발---- 복권이나 사거라."
기도는 연인 관계와 같아서 절반은 내 책임이다. 변화를 원하는데 정확히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소리내어 말하는 것조차 귀찮다면, 어떻게 그 기도가 이뤄지겠는가? 기도가 주는 혜택의 절반은 요구하는 자체에, 분명하면서도 충분히 고려된 의도를 전달하는 데 있다.
운명 역시 연인 관계와 같다. 운명은 신의 은총과 의식적인 자기 노력 사이의 놀음이다. 운명의 절반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나머지 절반은 완전 우리 손아귀에 있기에 우리의 행동이 결과에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인간은 단순한 신의 꼭두각시도, 자기 운명의 완벽한 지휘관도 아니다. 양쪽 모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략--
운명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차 있지만, 반면 내 사법권 안에 속하는 것들도 있다. ...시간을 어떻게 쓸지, 누구와 만날지, 내 인생과 몸, 돈, 에너지를 누구와 함께 할 것인지도 결정할 수 있다.
... 인생의 불행한 환경을 저주로 받아들일 것인지, 기회로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자신이 너무 불쌍해 낙천적인 견해를 취할 수 없을 때조차도 가치관을 계속 바꾸려고 노력하는 길을 택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생각을 선택할 수 있다.
"먹보야, 넌 매일 무슨 옷을 입을까 고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슨 생각을 할까 고르는 법을 배워야 해. 그건 네가 얼마든지 기를 수 있는 힘이야. 네가 정말로 네 인생을 통제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라면 마음을 훈련시켜. 그거야말로 네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거니까. 마음 외에 다른 건 다 내려놔. 네 생각을 어떻게 다스릴지 배우지 못하면, 넌 영영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될 테니까."
죄책감은 우리의 자아가 우리로 하여금 뭔가 도덕적인 진보를 이뤄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속임수예요. 거기 속아 넘어가선 안 돼요.
마침내 과거가 네게서 떠나면 떠나보내라. 그런 다음, 계단을 내려가 남은 인생을 시작하라. 크나큰 기쁨으로.
담배가 폐를 망치듯, 분노는 영혼을 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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