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제5강 중요한 것은 동기다--이마누엘 칸트 부분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여기 정리된 내용이 괜찮다고 책을 사는 것은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나머지는 모두 이 장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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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그가 누구든, 어디에 살든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면, 단순히 집단적 행복의 도구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존 로크 : 우리 삶과 자유는 우리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우리는 존중받아야 하는 존엄성을 지닌 이성적 존재로,,,
무한정 자기소유 권리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칸트의 권리 옹호>
-칸트는 우리가 흔히 시장의 자유나 소비자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자유에는 애초에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욕구를 충족하는 행위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행복 극대화의 문제점>
-도덕은 사람들이 특정한 시기에 드러내는 흥미, 바람, 욕구, 기호 같은 경험적 요소에만 좌우될 수 없다.
도덕을 사람들의 흥미와 기호를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도덕의 위엄이 땅에 떨어진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고, "계산에만 밝은 사람이 되게 할 뿐"이다.
-칸트는 우리가 늘 이성적으로 행동하며 자율적으로 선택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더러는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는 단지 우리가 이성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할 능력이 있으며, 이는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는 이성적 능력이 우리 능력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정한다.
우리는 쾌락과 고통을 느낄 능력도 있다. 그는 우리가 이성적 동물일 뿐 아니라 지각력 있는 동물이라고 말한다. 칸트가 말하는 "지각력"이란 감각과 느낌에 반응하는 능력이다.
*이성이 우리 의지를 통치할 때, 우리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욕망에 내몰리지 않는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두 가지 능력이 합쳐져
우리는 특별한 존재,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가 된다. 이 능력으로 우리는 단지 식욕만을 느끼는 동물에서 벗어난다.
<자유란 무엇인가>
-내 행동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든, 사회적으로 훈련된 것이든,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동은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천성이나 사회적인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에 걸맞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물>
-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 밖에 주어진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때 우리는 추구하는 목적의 주체가 아니라 도구가 된다.
자율은 이와 정반대다.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행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 덕에 인간의 삶은 특별한 존엄성을 지닌다. 바로 이것이 사람과 사물의 차이점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동기를 찾아라>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그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동기이며, 그것은 특정한 종류라야 한다. 중요한 건 옳은 일을 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옳기 때문이라야지, 이면에 숨은 동기 때문이어서는 안된다.
선한 의지가 선한 까닭은 그것이 어떤 효과나 결과를 낳아서가 아니다. 널리 인정받든 그렇지 않든 그 자체로 선하다. "비록 (...) 이 의지가 원래 의도를 널리 퍼뜨릴 힘이 매우 부족하다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를 얻을 수 없다 해도, (...)그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동기는 의무인데, 칸트가 말하는 의무 동기란 올바른 이유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끌림 동기'라 부른 것을 의무 동기와 대조해 비교한다. 그러면서 의무 동기에서 나온 행동만이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정직을 위한 정직과 이해타산을 따지는 정직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 번째 정직은 원칙을 고수하는 자세이고, 두 번째 정직은 타산적인 신중한 자세다.
동정심에서 나온 선행은 "아무리 옳고, 아무리 다정해도" 도덕적 가치가 떨어진다. 이타주의자의 동정은 칭찬과 격려를 받을 자격이 있지만, 존중받을 수는 없다.
이타주의자는 불행히도 어느날 인류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려, 연민과 동정이 메마른 인간 혐오자가 된다. 그러나 이 냉정한 영혼은 자신의 무관심을 떨쳐내고, 다른 사람을 돕는다. 내키지는 않지만 '순전히 의무감에서' 타인을 돕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그의 행동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중요한 점은 선행의 동기가 그 행동이 옳기 때문이라야지, 쾌락을 주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무엇인가>
* 내 의지가 자율적으로 결정될 때만이, 그러니까 내 의지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지배될 때만이 나는 자유롭다. 애초에 그러한 욕구를 직접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 욕구를 추구한다고 해서 어떻게 자유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칸트의 답은 이성이다. 우리는 감각이 전달하는 쾌락과 고통에 지배되는 감각적 존재일 뿐 아니라, 이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다. 만약 이성이 우리 의지를 결정한다면, 그 의지는 자연이나 끌림의 명령에 구애받지 않는 선택의 힘이 될 수 있다.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면, 이성이 내 의지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1. 정언명령 1. 당신의 행동준칙을 보편화하라.
행동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이는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
보편화하는 것은 강도 높은 도덕적 요구에 초점을 맞춰, 내가 하려는 행동이 다른 사람의 이익과 처지보다 내 이익과 처지를 앞세우지 않는지 점검하게 한다.
2. 정언명령 II :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인간은,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이성적 존재는, 이런저런 의지에 따라 임의로 사용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존재한다.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칸트가 보기에, 자살도 같은 이유로 정언명령을 위반한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목숨을 끊는다면, 나를 고통 완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사랑, 공감, 연대감, 동료의식은 타인 중에서도 특정한 타인에게 더 끌리는 도덕 감정이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러한 감정과는 관련이 없다.
* 칸트식 존중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며, 우리 모두에게 비차별적으로 존재하는 이성적 능력에 대한 존중이다. 그렇기에,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경우와 똑같이 용납될 수 없다.
<도덕과 자유>
정언명령(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여겨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행동만이 자유로운 행동이다.
가언명령에 따른 행동은 외부에 주어진 이익이나 목적을 의식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 의지는 내가 아닌 외부 힘에 의해, 내가 놓인 환경의 필요에 의해, 어쩌다 생긴 내 바람과 욕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 자율적으로 행동할 때,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할 때만이 본성과 환경의 명령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한 법칙은 특정한 바람이나 욕구에 구애받지 않는다.
* 따라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와 도덕의 까다로운 개념은 서로 연결된다. 자유롭게 행동하기, 즉 자율적으로 행동하기란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즉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하기와 똑같은 하나의 개념이다.
* 인간의 존엄성은 다름 아닌 보편적 법칙을 만드는 능력에 달렸다. 자신이 만든 법에 스스로 종속된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도덕법을 정할 때 우리는 이성적 존재, 칸트가 "순수 실천 이성"이라 부른 것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선택된다.
이성적 존재는 (...)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의 모든 행동을 (....) 지배하는 법칙을 알 수 있는 두 가지 관점을 갖는다. 첫째, 감각적 세계에 속해 있는 한, 자신이 자연법칙(타율)에 지배된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둘째, 지적 세계에 속해 있는 한, 자연법칙과는 독립되어 경험이 아닌 오직 이성을 토대로 한 법에 지배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연 존재로서 나는 감각 세계에 속한다. 내 행동은 자연법칙으로 원인과 결과라는 질서로 결정된다. 이는 인간 행동 중에서도 물리, 생물, 신경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나는 지적 세계에 산다. 여기서는 자연법칙과는 독립적으로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 자신을 지적 세계의 일부로 편입시키며, 의지의 자율을 그 결과인 도덕과 결부해 인식한다.
자유와 도덕에 관한 인식이 없다면 우리를 이해하고 우리 삶을 파악하기란 아주 어렵다.
우리가 이성적 존재만은 아니라는 점을 칸트도 인정한다.
* 필요 영역과 자유 영역, 두 지점에 동시에 발을 딛고 있는 탓에, 우리가 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과 존재해야 하는 방식 사이에 간극이 생기게 마련이다.
* 다른 식으로 말하면, 도덕은 경험적이지 않다. 그것은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판결을 내린다. 과학은 힘과 통찰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도덕적 물음에 도달하지 못한다. 과학은 감각 영역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정치>
--자유로운 성관계에 반대하는 칸트의 견해--
서로 동의한 경우라도 자유로운 성관계(혼외정사)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두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둘을 대상화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성관계를 거부할 근거는 그것이 오로지 성욕을 충족시킬 뿐 상대의 인간성을 존중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결혼이 성관계를 격상시킨다고 생각한다. 결혼은 성관계를 육체적 만족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연결시킨다.
타인이나 우리 자신을 단순히 물건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람을 단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보니 인간은 자신의 재산이 아니다.
칸트 시대에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치아를 사서 자기 잇몸에 심었다. 누구도 자기 팔다리를, 심지어는 치아 하나라도 팔 자격이 없다. 이는 자신을 대상으로, 단순한 수단으로, 이익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행위다.
칸트는 매춘도 똑같은 이유로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익을 바라고 내 몸을 다른 사람의 성욕 충족에 이용되게 하여 자신을 수요 대상으로 만드는 행위는 (...) 스테이크로 허기를 채우듯이 나를 대상으로 삼아 욕구를 채우도록 허락하는 행위다."
인간은 "이익을 바라고 자신을 마치 물건처럼 내놓아 상대가 성욕을 채우도록 허용할 자격이 없다." 이때 그 저변에 깔린 도덕 원칙은 인간은 자신의 재산이 아니며 자기 몸을 멋대로 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매춘과 자유로운 성관계에 반대하는 칸트의 견해는 그가 생각하는 자율인 이성적 존재의 자유의지와, 합의에 따른 개인 행동의 대조를 드러낸다. 우리가 의지를 발휘해 만든 도덕법은, 자신이든 타인이든, 인간을 대할 때는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 요구는 비록 자율에 근거하지만, 합의한 성인들끼리의 행동이라도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존중을 거스르는 행동에는 반대한다.
두 사람이 상대에게 자신의 전부를 줄 때만이, 그리고 성적 능력을 이용하지 않을 때만이 성관계가 대상화하지 않을 수 있다.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행위는 잘못인가?>
칸트는 거짓말을 단호히 거부한다.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는 결과에 상관없이 항상 유효하다.
뱅자맹 콩스탕 (프. 철학자) :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는 진실을 알 자격이 있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며, 살인자 같은 사람은 당연히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회피할 수 없는 발언에도 진실을 담아야 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상대로 지켜야 할 엄연한 의무다. 그에게나 다른 누구에게나 아무리 큰 불이익이 닥친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건 칸트의 견해다.)
칸트에게 도덕은 결과가 아닌 원칙의 문제라는 점을 기억하자.
거짓은 종류를 막론하고 "진실이라는 원천을 오염시킨다. (...) 따라서 진실하기(정직하기)는 신성하고 조건 없이 적용되는 이성의 법칙이며, 그 어떤 편의상의 예외도 인정할 수 없다.
진실인 발언은 노골적인 거짓말처럼 듣는 사람을 대놓고 속이거나 이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칸트와 정의>
어느 누구도 나더러 타인의 기준에 맞춰서 행복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저마다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법이 개인의 이익이나 욕구에 좌우될 수 없듯이, 정의의 원칙도 공동체의 이익이나 욕구에 좌우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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