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나도 모르겠다.
50대 초반인 우리 나이 때 적성 따져가며 취직하고 일 했을까?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중에서도 적성에 맞는 사람이 그 일을 잘하더라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교사였는데, 입버릇처럼 얘기한 것이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가 되라!' 였다.
가장 완벽주의적인 수직적 사고다.
한 50년 산 경험에 비추어 안 맞는 듯도 하고 맞는 듯도 하다. 그럼 적성에 비추어 이 얘기를 살펴 보자.
처음엔 뱀의 머리가 되었는데 나는 용이다. 정말 뱀이었던 친구들이 점점 머리가 되기 시작한다. 원래 내 적성과 본 모습이 아닌, 뱀이 되었으니, 나는 뱀의 꼬리도 유지하지가 힘들어진다. 재수 좋게 뱀의 머리가 되었다 한들, 용에게 잡아 먹힌다. 그럼 존재 자체가 없어진다.
근데 다행히도 뱀이 세력을 키워 용보다 힘이 세어 졌네? 그럼 서서히 나는 뱀의 세력에 밀려 꼬리에서도 쫓겨나서 다시 힘없는 용이 될 수 있다.
두 경우 다 별로다. 적성에 안 맞는 선택을 한 경우 말이다.
난 용이었는데 용의 꼬리가 되었다. 앞서 가는 머리는 되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용인 나의 본 모습으로 살 수 있으니까 말이다. 때로 용의 머리에게 치인다. 그래도 괜찮다. 왜? 난 용의 꼬리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좋으니까. 행복하니까. 그것이 성공 아닌가?
어쩌다 보니 용이 뱀에게 져서 세력을 잃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다른 조건을 보고 용이 된 것이 아닌, 용 자체가 좋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내가 어려서부터 내게 넌 국민학교(초등학교) 선생님 해라^^
대학교 강사님은 내게 또, 초등학교 반장의 모습이다, 라고 했는데, 그때는 그것이 나를 놀리는 줄 잘 몰랐지만, 아마 고정관념에 사로 잡힌 수직적 사고를 하는 나의 모습을 비꼬아 한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난 그때로부터 본질은 별로 안 변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너는 예전에 착하더니 왜 이렇게 나쁘게 변했냐? 라고 하기도 하지만, 본래의 내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나의 개성을 잃지 않겠다, 변하지 않겠다 를 모토로 평생을 살아왔고, 되도록 위선적으로 살지 않고 솔직하게 살겠다는 내 모습을 유지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의 철칙이었고 현재 바뀌지 않은 나의 그런 모습에 나자신은 비교적 만족한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그런 나의 모습을 싫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부모님 말씀, 선생님 말씀을 비교적 아주 잘 따르고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아 왔다. 그런데 길게 살다 보니, 사회 경험 없는 그들의 말을 그대로 따르다 보니, 나중에 무지 배신 당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 때부터 학교 때 반항한 사람이 인생을 잘 산 거구나, 학교 생활에 올바르게 적응하고 열심히 공부한 죄 밖에 없는데 왜 내게 이런 불이익이 오지? 내가 바보였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 이제부터 나는 니들의 말을 따르지 않겠다. 위선적인 니들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나에게 불이익이 될 뿐이다. 이런 결심으로 살아왔다. 그렇게 살다 보니 일정 정도 맞긴 하더라.
근데 최근의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그것이 꼭 올바른 길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학교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지식만 배우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된다. 학교는 더불어 사는 것, 참고 사는 것 이런 것도 배우는 곳이다.
그런데 무조건적인 학생의 인권만을 주장한다면, 차라리 학교가 없느니만 못하다. 그냥 다 학원 보내면 된다. 짐승처럼 각자 인권을 주장하며, 힘 센 학생이 약한 학생을 때리고, 또 그들이 커서 사회를 그렇게 유지하면 되지, 뭐하러 학교가 필요하겠는가?
하지만 교사도 공무원이다. 즉, 나라에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게 공무원이란 직업 특성이다. 하지만 옳은 것은 따르고 올바르지 않으면 따르지 않아야 진정한 교사라고 난 생각한다. 아무리 힘센 사람도 나의 정신을 가져갈 수 없다. 이렇게 하라고 해도, 옳지 않으면 내가 따르지 않으면 그만이다. 개인의 이익을, 집단의 이익을 위해 교육을 버리지 말자. 적어도 교육자라면 말이다.
무엇을 따르고 무엇을 따르지 말아야 할 지 잘 고민하고 행동함이 필요한 곳이 현재의 학교다.
교육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그것은 우리의 미래를 짊어진다, 그리고 우리의 현재 모습이 10-20년 전의 교육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우리는 예전 여당의 교육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생의 인권이 깡그리 무시되었던 학교 말이다.
그런데 당시 노무현 정권 (이해찬 교육부 장관 시절)이 했던 교육 정책도 꼭 바람직하지는 않다. 돈과 평가에 의해 교사를 재단한다면, 진정한 교육자로 살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수치적인 평가만이 다가 아니다. 학생, 학부모가 현재 아니라고 생각하는 교사가 사실 지나고 보면, 더 올바른 스승일 수도 있는 거다. 따라서 평가 제도는 일정정도 기여한 부분은 있으나 교사들을 분열시키고 거짓말하게 만들었다. 그럼 제대로 된 교육이 되겠는가?
그럼 지금 전교조가 만들어 놓은 것은 학생 인권의 극대치다. 학생들은 아직 사회 경험이 없다. 아무리 그들의 인권이 올라가더라도, 어른인 교사가 얼마든지 학생을 이용할 수 있다. 왜? 아무리 나빠도 학생들은 순진하니까. 게다가 그 시기는 충동적 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무서운 것이 없으면, 막 나갈 수가 있다. 막가파가 되는 거다.
그리하여 자기들에게 잘해주는 교사만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진다. 요즘 학생들은 자신이 잘못하고도 그 잘못을 모른다. 그 잘못을 지적하는 교사만 린치를 한다. 그것은 잘못된 사고다.
그런데 교사의 권위 없이 그런 학생들을 교육할 수가 없다. 현재의 학생들이 약한 교사를 린치하고 함부로 하며 수업 시간을 제멋대로 활용하는 것도 그 교육의 폐해다. 물론 교사들도 반성해야겠지만, 이런 식으로는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 지식을 교육해 놓았더니, 그 지식을 이용하여 나쁜 짓을 저지르고, 그래도 처벌이 어려운 게 현재 학교 현실이다.
따라서 학생 인권을 최대한 높여 놓고 교사의 권위를 없앤다면, 학교에 왜 다니나? 그냥 학원 다니면 된다. 지적 교육은 학원 강사가 제일 통달하고 있다. 그것도 영업이니까. 우리가 학교를 다니는 이유는 이 사회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학교에서 국민의 우민화 정책을 거행하고 있는 듯 하다.
왜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가? 공무원이나 교사의 공채, 이들의 특징은 정부의 시책에 협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불만을 공무원이나 교사를 공격하는 것으로 표출한다. 왜? 화는 나는데 풀 데가 없는 것이다. 정부를 대변하는 하급 공무원, 인권이 떨어진 여교사에게 마구 화를 표출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의 교육 무엇이 문제일까?
교육부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승진한 사람들은 부정부패를 가장 잘 하는 사람들이다.
전교조가 있다. 전교조는 말 그대로 교사들의 입장을 대변한 집단이다. 즉, 교사 자기들 집단 이익이 우선인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이 교육부를 대변하는 교장보다는 다소 착하다 하더라고 결국 자기 밥그릇을 뛰어 넘지 못하는 것이다.
자 교사(학원 강사도 포함된다. 많아서 힘을 과시하니까) 밥그릇으로 들어가 보자. 밥그릇 수 가장 많은 교사가 승진하여 교육부에 있다. 그것은 과목 당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등이다. 전교조에도 다수가 그 과목을 담당하는 교사다. 그러니 교육부 자체적으로 바뀔 리는 없는 셈이다.
그리하여 지금 초(중)등교육과는 축소되고 체육건강과가 점점 힘이 세어지고 돈도 많아지는 추세다. 아 교육부에도 무지 돈이 간다. 근데 다 연구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학생에게 힘을 쓰고 교육에 힘쓰는 사람이 혜택을 못 본다. 성교육 연구하면 돈을 준다지만 나는 하기 싫다. 뭐하러? 교육을 위해서 생각할 때도 맨날 성만 생각하다가 미칠 판이었는데? 다시 연구를 하자면, 매일 성욕에 시달리며 책을 봐야 한다. 해소할 대상도 없는데 말이다. 기본적으로 그렇게 깊이 연구하기 싫다. 그냥 이미 연구는 충분히 했으니 교육할 시간이나 주면 좋겠다. 아 물론 이렇게 학생 인권이 올라가서 보건교사를 지들 발 밑의 때로 연기는 학생이 많은 상황에서는 교육하기 싫다. 잘못하면 성희롱만 당하지 뭔 영화를 보겠는가?
자, 보건교사는 교육을 안하여 우리가 정교사가 되지 못하는구나 하며 20년 이상 생각하고 그리고 교육을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렇게 협소하던 체육건강과를 벗어나서 초(중)등 교육과에 소속되기 위하여. 그리하여 교육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보건교사가 초(중)등교육과에 들어가기 보다는 체육건강과가 도리어 커진 것이다. 보건교사는 다른 교사와 마찬가지로 교육학과 전공을 시험 보고, 똑같은 임용고시를 통하여 입사했는데도 여전히 차별 받고 있다.
지금 보건교사의 위치는 세군데서 뜯어 먹고 있다. 학교건강진흥원, 이곳은 기존의 보건교사의 교육을 쭉 담당해왔던 곳인데, 지금은 체육건강과에서 보건교사를 끌어간 셈이다. 그래서 보건교사는 교육과, 학교보건진흥원, 체육건강과 로 나뉜다. 여기서 보건교사는 3명의 윗사람을 두는 셈이 된다. 교육 쪽에서는 기존 과목 교사들, 학교건강진흥원은 의사, 체육건강과 쪽에서는 체육과 출신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물론 나는 열심히 안했다.) 결국 윗사람만 새로 만든 격이 되고, 계속 따가리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거 남녀 차별이며, 직업 차별, 전공 차별 아니냐?
무슨 지금이 조선시대 신분제 사회냐? 직업에 무슨 아래위가 있냐? 모든 직업은 동등한 것이지.
보건교사가 정교사가 되는 방법은 교육원이든, 사범대를 재입학하여 체육 교사가 되는 것이다. 그 외 과목은 자격증을 따도 변경하지 못한다. 참 희한한 것이다. 동등한 자격을 통하여 입사했는데 마치 체육 교사 밑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체육부장 밑에서 한 20년 이상 근무를 했다.
그랬더니, 노력은 보건교사가 하고 그 열매는 다른 교사들이 다 따 먹었다. 체육건강과에 지금 예산이 얼마나 나오는지 아는가? 그런데 그 체육건강과의 많은 수가 아마 체육과에서 승진한 사람들일 것이다. 물론 교육과 쪽으로도 돈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그 돈들이 다 국민 세금이다. 제대로 운용되어야 진정한 기여를 할 것인데, 부정부패한 인간들이 돈이면 불을 켜고 달려들고 결재를 안해 주는데, 무슨 놈의 올바른 집행이 될 것이냐?
한마디로 노력은 보건교사가 하고 그 열매는 일단 체육부에서 따 먹었다. 계속 따 먹으려고 보건교사의 인원은 안 늘려 주면서(정교사는 안 시켜주고--> 이것은 교사 수급과 관련된다.), 응급처치와 수업까지 다 시켜 먹으려고 지금 작전 중이다.
또, 열심히 노력하는 보건교사들이 정신검사 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학생들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 놓았더니, 실무는 보건교사에게 시키고, 그 열매는 상담 교사 (정교사다) 티오 늘리는데 기여했다. 그리하여 많은 교사에게 상담 교사로 전과하려면 하라는 공문이 왔지만, 그곳에는 엄연히 보건교사는 제외. 라는 항목이 있었다. 그리하여 20년이 훌쩍 넘는 보건교사도 신규 상담 교사의 따가리를 하는 실정이다.
자, 일은 보건교사가 하고, 그 열매를 얻는 것에서 보건교사는 단지 정교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누가 열심히 일하고 싶겠는가? 체육건강과가 커진 것은 시대적 요구도 있었겠지만, 보건교사가 수업을 위해 그토록 노력한 결과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태까지 단지 이름상 체육부에 있어 체육부장 밑에 있었다는 이유로 체육건강과의 수많은 체육 교사 밑에 딸랑 1명의 보건교사가 장학사(이제 겨우,,,)란 이름으로 앉아 있었다. 어떤 장학사는 정신 상담 검사를 만들었지만 그 실행을 거부하는 보건교사와 상담 교사 사이에서 치이다가 병을 얻어 명퇴했다.
예전에는 니네는 수업을 안하니까 정교사가 아니다, 라고 20년을 속이더니만, 수업을 한 지 어언 10년쯤 되었는데도 이제는 응급처치도 시키고 수업도 시키면서 정교사가 아니란다. 아 물론 앞으로의 세상은 정교사보다 보건교사가 나아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교육이 초(중)등교육과 체육건강과로 찢어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그럼 니들이 체육교사가 되면 될 거 아니냐? 라고 하는 사람 분명히 있을테다. 적성 자체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일단 나라는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교사 중에 체육 교사가 제일 싫다. 왜냐하면 내가 겪어 본 체육 교사들은 대부분 비리의 온상이다. 물론 아닌 분들 많으리라.
일단 몸 움직이는 일이라 내 적성엔 안 맞다. 그곳은 원체 돈이 많이 들어오는 곳이라 그렇다. 보건교사에게도 예산이 많이 주어지고 있다. 약값 등 여러 분야에서 말이다. 그러나 깨끗하다.
나는 앞으로 직업을 선택하거나 어디에 있더라도 공부(독서) 잘하는 사람이 많은 분야에 있고 싶다. 그들이 갖추고 있는 것은 투명성이고 인간성이다. 아, 물론 요즘 학생들은 공부 잘하니까 영악하기만 하더라만. 누가 뭐라고 한들, 공정함이다.
대체로 현실이 열악해서인지 모르겠으나 공부 못하는 사람들 축에 가면 비인간적이고 비리가 많다. 비합리적이다. 짐승 세계 같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 살아남는 게 싫다.
좌우간 난 열심히 하지는 않았으나 열심히 하는 보건교사들을 보니 짠하다. 나는 글을 쓰고 혼자 있는 지금의 상태가 가장 좋다. 하지만 괜히 앉아서 편히 열매를 따 먹으려니 미안해진다.
아, 이 얘기를 왜 했더라? 좌우간 나는 꽤 교육 적성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직접 교육을 해보니, 아 이 제자들은 가르치고 싶은 제자가 아니다. 게다가 나는 의외로 인간을 상대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즉,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혼자 잘 지낸다. 책과 인간 관계를 대신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적성이 아니다. 다만, 배우기를 작정하고 배우러 오는 사람들은 좋아한다. 그러니까 적성이 있다면, 육체적 움직임을 좋아하는 사람과 앉아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몸 움직이는 일이 적성이다 싶다. 나는 손재주가 잼뱅이라 손으로 하는 일이 다 싫다. 그래서 공부를 하나 보다. 좌우간,,,
1. 적성이란 게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조선 시대의 계급 사회인 거 같다. 그러면서 미국산 자본주의가 수입되어 천박한 자본주의와 결합해 있다.
예전 계급 사회를 보자.
양반, 중인, 양인, 천민
이렇게 나뉘었다.
양반은 주로 책을 읽었다, 아니 읽어야 했다.
중인은 주로 기술직에 종사했다, 의학이나 물건 만드는 것 등등.
양인은 농사를 지었다.
천민은 도축을 하거나 기타 등등 힘든 일을 했다.
1) 이 피가 적성이라면 적성일 거 같다.
예전에는 신분 사회였지만, 현대는 이 일들을 하면 모두 돈을 지불한다. 양반인데도 책 읽기 싫었던 양반도 있을 거고, 천민인데 책 읽고 싶었던 천민도 있을 거다. 다 그게 적성이다.
2) 또는 부모의 직업이 자기 적성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를 보자. 모짜르트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게 된 데는, 음악가인 모짜르트 아버지의 힘이 크다. 거의 옹아리도 떼지 않은 시기부터 피아노를 가르쳤으니, 당연히 그 분야의 천재가 되지 않겠나? 남보다 일찍 시작했으니, 같은 나이에 다른 사람보다 훨씬 그 일을 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꼭 올바른 교육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좌우간 대체로 부모가 하던 일을 자기도 하면 잘하는 경향은 있다.
* 동일한 비용이 지불된다면, 당신은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내가 생각할 때는 그것이 적성 같다.
만일 당신이 어떤 일을 하고 싶은데, 다른 일에 비해 약간 댓가가 적다, 그래도 하고 싶다고?
그게 당신의 적성이다.
2. 적성이 없다고 한다면,
누구나 하고 싶은 일에는 적은 댓가를 지불하고,
누구나 하기 싫은 일에는 많은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 공평하다.
* 자 당신은 적성이란 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있는 거 같다. 그리고 나는 교육 적성이며 작가 적성이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잘 할 거 같은가? 그것이 당신의 적성이다.
부모가 뭐라고 하건, 현재 어떤 일이 대우가 좋건, 당신의 생각을 바꾸지 마라.
세상은 늘 변하게 되어 있고, 언제 당신이 택한 일의 조건이 달라질 지 모른다.
그러므로 적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 적성인 일을 선택하라,
그래야 행복하고, 성공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20대라면, 평생 약 60년 이상 그 일과 관련된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
그 일에서 약간 변형되어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게 될 수도 있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해야 할 거다.
그러니 되도록 당신 적성에 맞는 일(직업)을 선택하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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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학교에서 진로 지도를 엄청나게 한다. 근데 그 진로 교사로의 진출도 보건교사는 막혀 있다, 왜냐? 정교사가 아니니까. 다른 일반 교사 모두 경력되고 관심 있으면 지원할 수 있는데, 보건 교사만 안된다. 말이 되나?
진로 지도는 경험이 중요하다. 아무리 그 직업을 전공한 사람이 와서 얘기를 한다고 해도, 좋은 점만 얘기하지 디테일한 어려움 등은 얘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 전공에 아주 딱 맞는 사람만 갔기 때문이며, 안 좋은 점을 얘기하면, 우수한 학생이 자기 전공 쪽으로 오겠는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로 지도는 관심이 있으면서, 사회 경험도 있는 보건 교사가 딱이다. 그런데도 그냥 자격 제한에 묶어 두었다. 지금 정말 많은 여학생들, 말 잘 듣기 땜에 어떤 지도가 안 이루어진다. 이들의 진로 지도를 어떻게 남자 교사에게만 맡기겠는가? 여성의 직업 현실에 대해 뭘 아나? 물론 남성 여성 나누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취업할 수 있는 직업에 대한 안내도 해야 한다.
또 아울러 성교육이란 과목이 생기면, 남자 교사도 있어야 한다. 보건 교사가 하는 성교육은 여학생에게는 잘 맞을 지 모르나 남학생은 모른다. 같은 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완전 여성성은 아니므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교육은 말로만 되는 게 아니니까.
남학생 성교육에는 일정 정도 남교사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성교육과 더불어 보건 교육이 생기고 정교사가 되어 교사 간 이동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 시대가 달라지면 과목도 달라져야 한다.
더불어 교사의 평가를 학생, 학부모가 하는데, 실제 교감, 교장되는 평점은 교장이 한다. 이미 이 평가가 이루어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났다면, 교사 평가를 반대하는 전교조는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교감, 교장 되는데 학생, 학부모 평가를 반영하자는 방향으로 개선이 이루어지는 편이 낫다. 어차피 할 평가라면, 올바른 평가가 되어 승진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그래야 진정한 교육에 힘쓰지, 학교의 승진 체계는 진정한 교육에 몸 담는 사람보다 곁다리에 노력하는 사람을 승진시킨다. 연구? 연구는 대학원 다니는 사람이나 그 과의 교수가 하면 된다. 교사는 연구보다 교육이 우선이다. 교육하는 사람이 승진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될 거 같다. 이것은 사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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