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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느낌

<하녀들>과 <리스본행 야간열차>, 바닥에 떨어져봐야 바닥에 있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하녀들>이 끝났다.  마지막회는 못보고 이 글을 쓴다. 

 

 만일 여주인공이 하녀가 되어보지 않았다면, 과연 하녀의 삶을 이해했을까? 

누구든 남의 처지가 되어 보지 않으면, 그사람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사회생활을 해보기 전까지, 나는 그래도 우리 사회가 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라고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취직하고 내가 너무도 힘든 것은 겉과 속이 다른 상사를 만난 것과 적성에 안 맞는 과를 선택한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25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불공정한 사회를 공정하다고 인식한 나의 판단에 오류가 있었던 셈이다.  돌이켜 보면, 그 직장을 그만둔 사람들은 얼굴 표정이 편안해 보이고 다들 2kg 정도는 살이 쪘던 기억이 난다.  그런거 보면 직장에서 돈번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직장이 더더욱 꽤 힘든 직장인 셈이었다.

 

  그때까지는 공부를 잘했고 여자였기 땜에 폭력과 맞닥뜨리거나 아주 센 불공정과 맞닥뜨릴 일은 없었다.  그냥 우리사회가 여자도 취직하기 좋고, 내가 선택한 과가 공부 잘하는 사람들 가는 보편적인 과였으면 나는 영원히 못느끼고 살았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냥 법과 도덕 지키고 공부하고 혼자 잘 지내는 게 나의 특성이니까.  그런데 다행하게도 나는 아주 낮은 계급만 가는 과에 몸담았다.  어쩌다 보니. 

 

  그리하여 나는 그나마 나은 직업을 찾아 공채를 보게 되었다.  그만둔 첫번째 직장에 가기 전에는 그렇게 안좋아 보였던 조건들이 급 엄청 좋은 조건으로 보였다.  바뀐 직장은 그 이전 직장보다 나은 것은 맞지만 여전히 불공정을 시대마다 떠안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계속 나는 적성에 안맞다 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꽤 적성에 맞나보다.  그러니 20년 넘게 안 그만두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한 두어가지 정도가 나의 적성에 맞다.  아니면 적성이 없다 라고 친다면 근무조건이 좋든지.  둘 중 하나는 될 것이다.  아니면 둘다거나. 

 

  지루한 너의 삶 얘기를 계속 듣고 있어야 되냐?  라고 할테니, 이만 각설하고.  이제 살만해지니 또다른 일들이 발생한다.  난 모든 문제가 법적으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일을 겪다 보니,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왜 있는 지 알겠다.  법전은 모두 한글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시험도 한글로 치고, 요즘 사람 중에 누가 그렇게 한문을 잘한다고 한문으로 시험치고 한문 법전을 두겠는가?  그건 접근이 어렵게 두려는 어떤 음모다.  그리하여 법을 만드는 사람도 사람이다.  그것도 가장 위에 있는 어쩌면 나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나쁜 사람들이 만든 법이 과연 공정할까?  그런 상상, 의문 한번 품어본다.  그래도 좌우간 명목상이라도 법은 공정하게 적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법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다.

 

  그럼 사람들은 원래 도덕적인가?  이런 의문 품어본다.  인간은 환경이 열악하면 도덕이고 뭐고 충분히 내팽개칠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같은 환경에서도 그 환경을 감내하는 사람이 있고 그걸 내팽개치는 사람이 있다.  또 같은 환경이지만 공정하냐 안하냐에 따라 사람들의 분노의 크기는 달라진다. 

 

  자다가 생각한 의문인데, 토끼가 도망을 치는데 늑대가 잡으러 간다.  늑대는 토끼를 잡을 수 있을까?

  정답 : 못 잡는다.  왜?  토끼는 목숨 걸고 뛰고, 늑대는 한 끼 끼니를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갈 데 없는 토끼가 더 빨리 뛰기 때문이다.

  그럼 이번엔 이런 질문 한번 던져 본다.  토끼가 도망을 치는데 호랑이가 잡으러 간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수 있을까?

  정담 : 잡는다.  왜?  아무리 토끼가 목숨을 걸어도 호랑이는 늑대보다 보폭도 넓고 게다가 이 호랑이는 배고픈 호랑이였다.  즉, 자기도 이 한끼 밥인 토끼를 놓치면 굶어 죽을 판이다.  둘다 목숨을 걸었으니, 더 빨리 뛰고 사나운 놈이 이긴다.  

   (정답 수정 : 우리 사회에서는 그래도 못 잡는다.  토끼가 도덕성이나 측은지심만 버리면 상대적 갑에 있는 토끼를 을인 호랑이는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 의문을 우리 사회에 대입해 볼까?  위에는 엄청 사나우며 나쁜 놈들이 모두 가지고 지시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늑대다.  그런데 배고픈 토끼를 자기 손으로 잡을 수 없으니 이제 더 사납고 배고픈 호랑이족들을 노예로 끌어들인다.  그럼 중간에서 치이는 자는 토끼다.  배는 고프지만 힘은 없는, 또는 인간성이 괜찮아 이곳에 기존에 참고 살던 토끼말이다.  이 호랑이족들은 참을성을 배우지 못해서 비록 사회적 계급이 토끼의 밑에 있어도 복종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한다. 그럼 약간의 높은 위치에 있는 토끼는 생각한다. 살 길은 뭘까?  그건 이민밖에 없다.  이 나라에서는 더이상 공정성이 없고 맨날 세금 내봐야 아래위 맹수들 뒤치닥꺼리에만 들어가는데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곳에 살겠나?  근데 능력은 안되네,,  이렇게 말이다.  그러나 이민 가봐야 세상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난 생각하는 것이, 누구나 쉽게 먹고 살고 싶다.  그리고 내 DNA는 영원히 남기고 싶다.  그런데 다 같이 공평하게 살자고 한다면 그게 불가능하다.  물론 이것도 방송에 내가 세뇌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아직도 이 세계의 10명중 7명이 재래식 변기를 사용하고 있단다.  가장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들도 자신의 나라에서는 민주자유주의일 지 모르지만, 자기 나라 국민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다른 나라에 몹쓸 짓들을 저지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세금이 우리나라 국민을 위해서 사용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민갈 필요는 없는 셈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만큼 자연환경이 좋은 곳이 많지 않다.  그러니 각국에서 우리나라를 침범하려 하고, 또 인구밀도가 그만큼 높은 것이다.  사실 캐나다니 뉴질랜드니 들먹이지만 실제 그 나라들 춥고 땅은 넓은데 사람은 그만큼 없다.  미국도 마찬가지.  왜 그렇겠나?  자연환경이 척박하니 사람이 많이 안살기 때문이다.  물론 미래는 유비쿼터스가 진행되면 굳이 자연환경이 상관없게 될런지도 모르겠으나 풀없이 살기는 힘들거다.  그러니 완전히 상관없지는 않을터.  다만 그 세금을 운용하는 사람은 좀 제대로 뽑기로 하자.  외국에 나라 팔아먹는 매국노 말고 말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로 돌아가서, 이 영화는 레이몬드 라는 문학 교사가 우연한 한 여자와 한 권의 책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리스본으로 여행을 떠나, 그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의 삶을 찾아가면서 아마데우의 삶이 액자 구조식으로 전개된다.  아마데우는 판사인 부친을 둔 의학도다.  그가 함께 몸담고 있는 지하조직 (군부를 무너뜨리려는 혁명세력)의 절친인 조지는 그와 사회적 출신 성분이 다르다.  이 영화는 아마데우의 삶을 쫓아가는 여정으로 감동을 준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만일 아마데우가 조지의 처지였다면 어땠을까?  를 한번 떠올려 본다.  공평성 공정성을 외치는 사람들이 자신이 처지가 바뀌면 쉽게 그 공정성을 바꾸는 경우를 보게 된다.  나란 인간의 마음 밑바탕도 보면 그러하다.  사회 정의나 공평, 자유를 논하지만 그러한 정의들이 내게 부당하게 다가올 때 나는 그 가치들을 버리고 싶다.  사람들은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신의가 나의 삶을 피곤하게 만들고 불이익이 되면 어제든 그 신의는 버려질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이런 의문 떠올려 보는 것이다.  아마데우가 조지와 같은 처치였어도 과연 그런 맘이었을까?  라는 의문 말이다.

 

  이제 사회는 변화되고 있다.  때로 그 변화가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되거나 불공평할 때 나는 그 변화를 거부하고 싶다.  인권이 주어지는 사회, 좋다.  그런데 인간은 교육받지 않아도 인간이 될까?  동물로 존재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리하여 그 인권과 자유가 모두 자유롭게 주어질 때, 결국은 동물적 본성이 우위에 있는 사람이 인간적 본성이 우위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때, 그때도 인권과 자유가 교육보다 우선시되어야 할까?  어쩌면 부당한 권력이 그 동물적 본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실리를 챙긴다면, 당하는 토끼만 불쌍하게 되겠다.  힘있는 토끼는 그냥 안 그만두고 있을테니 말이다.  테스토스테론은 권위에만 복종하는데, 권위가 부재한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나?  물론 인간성에 호소하고 환경을 조정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 환경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피해자는 누가 될까?  인간의 도덕성 심성 측은지심 인을 지키는 사람만 피해를 볼 것이다.  아니 더 큰 피해는 동물적으로 사는 사람일수도 있다.  사회는 그 동물적 본성을 표출하여 스스로를 희생하는 사람에 의해서만 변할 수도 있으니까.  참는 사람이 많으면 사회는 변하기 어렵다.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버럭하는 사람에 의해 변하지.  그러나 나는 나의 이익을 위해 버럭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체제이다. 

 

     자유주의는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표방하고, 정치적으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 언론, 출판 결사 사상의 자유를 내세우는 사회사상이다.

 

   민주주의는   정치적으로는 법치주의, 민주적인 선거제도, 다당계 의회정치, 법 앞의 평등을 내세우는 정치이념이며,  경제적으로는 부의 편중을 해소하고 사회적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경제민주주의를 내세운다. 

 

    지난날의 독재정권은 독점적 자본주의의 요소만 강조하고 나머지는 무시하거나 부정한 체제였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반민주적 군사독재를 취하고, 경제적으로는 독점적 자본주의를 채택한 체제를 극악한 반민주적 체제의 하나로 파시즘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파시즘이냐 자유민주주의냐?  

 그리하여 데모를 하는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가 되라고 데모하거나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데모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이것은 이상적인 어떤 체제라는 면을 얘기하고자 한다.  현실적으로 모든 국가를 보아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곳이 있나?  그러므로 우리는 이 체제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면서 어떻게 우리나라가 제대로 나아가며 적어도 행복에 조금이라도 접근하며 살아갈 지를 제대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아마데우가 조지의 처지였어도,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줄거리는 같아졌을까? 

   마음 착한 아가씨가 하녀가 되었어도 그녀는 착한 하녀였을까?  우리는 그런 의문을 가져보아야 할 것이다.

   더불어 인간은 원래 도덕적인가?  어느정도나?  이런 의문도 떠올려 본다.

   환경이 열악하다,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동물처럼 아니면 인간처럼 아니면 도덕적으로?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

 

    "자유란?  소극적 의미의 자유와 적극적 의미의 자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자유는 강제의 부재를 의미한다.  강제가 없다면 소극적 의미에서 우리는 자유롭다.  낯선 곳을 여행하고 싶은데, 강제로 여행할 수 없게 된다면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가 밀은 [자유론]에서 개인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개입으로부터도 벗어나 자신의 삶을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조직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한다는 자유의 의미를 말했다.  이러한 의미의 자유는 소극적 의미의 자유이다.

 

      적극적 자유는 이러한 소극적 자유의 의미에 자율의 능력을 더한 개념이다.  "저것이 아니라 이것을 함, 저것이 아니라 이것임'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적인 통제력과 지향이야말로 적극적 자유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모두 우연으로 점철된 영화다.  여기서 우연의 개념은 인간의 삶을 어떤 고정된 형식이나 굴레에 한정시키거나 필연 혹은 운명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일체의 외적인 강압 내지 강제에 대한 거부를 함축하고 있다.  영화속에서 아마데우는 일체의 기성의 권위와 기득권적 가치를 거부한다.

 

      푸코는 인간사란 인간의 의도에 따라 전개되지 않으며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사나 역사는 하나하나 쌓여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질적인 단층들이 서로 무관하게 모인 우연의 계열일 뿐이다.

 

      우연에 대한 강조가 강제의 거부라는 측면에서는 이른바 소극적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일 수 있지만, 강제의 거부는 동시에 '저것이 아니라 이것을 함.  저것이 아니라 이것임'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적인 통제력과 지향, 즉 적극적인 '의지의 자유'를 함께 포함하는 것이다.

 

       샤르트르에게 자유란 무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거두어 내고 용기있게 스스로 선택하고 실천하고 책임지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결단이다. 

 

       이 영화에서 계속 보여지는 우연의 이면에는 적극적이고도 주체적인 의지의 자유는 스스로 가치를 형성하며 자신의 자유를 확장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지향적 존재로 전환한다.  그리고 이 지향의 궁극에 이르러 우주만상에 대한 참된 진상을 발견했다고 판단될 경우, 헤겔은 자신의 자유의지의 궁극적인 목표와의 일치로 자유를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민족, 국가, 종교, 이념이라는 '전체'에 자발적으로 자아를 종속시켜 '자유'의 이름으로 '예속'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한편 포퍼 같은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은 '소극적 자유'가 현실적으로 더 안전한 삶과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유는 정신의 본질로 속박과 해방을 넘어 꿈과 이상을 향해 통제할 수 없는 호기심과 상상력의 원천이다.

 

       우리는 일상적 삶에 익숙해 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늘 낯설고 불안을 안겨 주며,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은 불운의 위험성이 있고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므로, 우리는 쉬운 것, 익숙한 것, 편한 것들을 찾는다.  또한 남들의 시선과 생각에 매몰되어 있다.

 

        그러나 아마데우를 비롯한 영화 속 젊은이들은 타성적 삶을 거부한다.  억압과 고통의 격동의 시기를 열정과 용기, 희망과 믿음으로 헤쳐 나가는 이들의 격정적인 삶은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현재를 살아가는 레이먼드 자신을 근복적으로 되돌아보게 하고, 그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열정과 욕망, 사랑과 용기를 한꺼번에 분출하게 만든다.

 

       타성적 삶에 대한 거부와 반역,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치열한 반성은 잠재된 욕망과 능력을 일깨우고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감정들을 섬세하게 변화시켜 그를 만나는 타인마저도 새롭게 변화시키는 계기를 가져다준다.

 

       *지성과 자유의 참된 의미는 타성에 대한 거부이자 지적인 긴장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뭐냐고?  

 

                                               <하녀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