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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힐링을 주는 음악 : <악마의 바이올린> 영화와 앨범 :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린>이란 영화는 파가니니라는 19세기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의 삶을 극화한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러 가서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깜짝 놀랐었다.   너무나 천재적인 바이올린 연주 때문에 말이다.

 

이 작품의 음악이라고 찾았던 것이 사실은 다른 것이었다는 걸, 어제 알았다.

 

 

 

<악마의 바이올린>으로 검색해서 앨범 부분에 보아야 제대로 된 걸 들을 수 있다.  

 

그래도 영화 안에서의 연주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는. 

 

 여튼 이 7곡의 파가니니 연주곡이 맘을 힐링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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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가니니>

 

 

1. 개요 

 

  일명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린 인물로,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군림했던 이탈리아인 바이올린, 비올라, 클래식 기타 연주자이자 작곡가, 지휘자이다.

역사상 최고로 꼽히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19세기 바이올리니스트의 상징이며, 낭만주의를 예고했으며 비르투오소의 시대를 연 최초의 연주가다. 몇몇 경우에 따라서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이 신(新) 고전주의 시대에 활동했다고 보기도 하며, 또는 초기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했다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파가니니는 음악의 낭만주의 시대를 연 선구자격 인물임에 분명하며, 후대 대표 낭만주의 작곡가들인 프란츠 리스트, 로베르트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등도 파가니니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재능과 작품, 그에 반비례하는 수준의 막장 인생 때문에 이른바 악마의 재능의 원조로 꼽힌다.

 

 

2. 생애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몇개월만에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유명해졌다. 파가니니의 재능을 눈치챈 그의 부친은 베토벤의 부친처럼 아들에게 하루에 10시간씩 혹독한 연습을 시켰다.

1799년 17세의 나이에 이미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바이올린의 거장으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연주회와 교습으로 젊은 나이에 명성과 부(富)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너무 빠른 성공에 도취된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들었으며 결국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자신이 아끼던 명품 바이올린 과르네리까지 팔아야 했다.

이후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를 했는데, 이 기간 동안 연주회도 열지 않고 사람들과 만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기간에 건강을 회복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바이올린 주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해부터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누이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밀라노,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천재적 재능을 뽐내며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명성은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 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모자·장갑·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연방 각지를 순회한 끝에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파르마 공국 파르마에 정착하였다.


  말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 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다. 더욱이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가 자기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것과도 관계가 있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신의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하지만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연주를 거절했고, "이탈리아의 해롤드"라는 곡명으로 다른 사람의 연주에 의해 초연되었다. 이에 대한 뒷 이야기도 있는데 자세한 것은 베를리오즈 항목 참조.


  베를리오즈와 만날 무렵부터 파가니니는 건강이 악화돼서 연주 활동이 뜸해졌으며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니차[2]에서 57세로 사망하였다. 후손은 외아들 아킬레 파가니니 (1825년 ~ 1895년)가 있었으며 그의 곁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3. 평가

 

  1832년 직접 파가니니의 연주를 라이브 공연으로 들어본 리스트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는 기록을 남겼으며 당시에 대하여 회상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수십여년이 지나도, 난 그 때의 여운을 잊지 못한다. 그 때, 나는 파가니니 연주를 듣고 눈물이 계속 나왔고 나는 죽어도 저 사람의 연주 실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 누가 저 사람을 바이올린 연주로 앞선단 말이냐!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저 사람이 바이올린을 한다면 나는 피아노로써 파가니니가 되겠다! 아니면 미치광이가 되거나!

친구에게 보낸 리스트의 편지를 봐도
2주 동안 내 마음과 손가락은 마치 길 잃은 영혼처럼 움직이고 있다네.
호메로스, 성서, 플라톤, 로크, 바이런, 위고, 라마르틴,샤토브리앙, 베토벤, 바흐, 훔멜, 모차르트, 베버가 모두 내 곁에 있다네.
나는 이들을 공부하고, 이들에 대해 명상하며, 분노로 그들을 집어삼킨다네.
뿐만 아니라 나는 하루에 4시간에서 5시간 정도를 손가락 연습[3]에 쓰고 있다네.
아! 만약 내가 미치지 않는다면 자네는 내 안에서 예술가를 찾을 수 있을 걸세!
그래, 예술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지.

 

 

     이하 생략... ...     

 

     나머지 내용도 평가라기 보다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으니까,,, 나무위키에서 검색해 보면 좋을듯 싶어요^^

 

      (출처 : 나무위키)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악마의 바이올린> 영화의 원제)

 

 

파가니니: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Der Teufelsgeiger)는 2013년 개봉된 영화로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에 대해 다룬 로맨스 영화이다.

 

 

 

              줄거리[편집]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인 니콜로 파가니니는 진부한 음악성으로 관객들에게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때에 우르바니라는 남자가 파가니니의 하인이 되는 대신 다음생에 파가니니가 자신의 하인되겠다는 계약을 맺고자 찾아온다. 파가니니는 계약을 승낙하고 점점 자신의 음악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던 중 영국 런던의 존 왓슨이라는 음악가가 런던에서 연주회를 해달라는 편지가 오고 파가니니는 공연을 위해 런던으로 가 왓슨의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그곳에서 파가니니는 왓슨의 딸인 샬롯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주연[편집]

 

                              (출처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