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정말 많은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은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글쓰기 공부에 반생을 바친(?) 사람으로 모든 글쓰기책을 섭렵하고 그 노하우를 전수한다. 작가는 자신의 글쓰는 분야(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나의 비빌 언덕')를 글쓰기 가르치기로 잡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다. 이 책을 예전에 읽었었는데 다시 읽으면서 전혀 그 사실을 몰랐다. 아니 이렇게 괜찮은 책이? 하고 한참을 읽어가다 보니까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기억력이... ㅠ ㅠ.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의 기억력이 10대 같았다면 난 다시 이 책을 읽을 생각은 안하고 제껴두었을테니까. 나의 못난 기억력 덕에 좋은 책을 다시 접하게 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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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당신도 써라] 배상문 지음, 북포스, 2009.6
<본문 정리>
(주 : 이 책의 목차만 봐도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머리말
나에게 '하고 싶은 말(메시지)'이 있고, 그 말이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가 닿았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글을 썼다'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알 만한 사람은 알아줄 것"이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려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차원을 넘어 '독자 중심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내 글을 읽는 독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지, 내가 쓴 글이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 이해될지, 혹시나 오해의 여지는 없는지, 어법과 맞춤법은 제대로 지켰는지, 가독성을 위해 얼마나 문장을 닦고 조이고 기름 쳤는지...... 이런 고민을 거쳐서 나온 글이야말로 제대로 된 글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패러다임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향후 10년 안에 이 모든 관념이 바뀔 것이다. '종이책'을 내지 않거나 '등단'이라는 제도를 거치지 않고도 얼마든지 기존 작가의 지위와 맞먹는 인터넷 작가가 탄생할 것이다. 요컨대 글을 내놓는 '매체'의 종류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주 : 그래도 여전히 난 종이책이 좋다. 하지만 등단이란 높은 담벼락이 없다는 상상만으로도 가능성이 무한대로 늘어나는 해방감을 안겨 주고, 나도 쓸 수 있겠다는 희망을 주지 않는가?)
종이책의 저자가 되거나 특정 매체를 통해 등단을 한다면 물론 기분은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즐거움일 뿐이다. 글쓰기의 본질은 글쓰기 자체에 있다.
'개든 소든 누구나 글을 쓰는 때가 바로 참된 민주시대"
그런 의미에서 나 같은 '개나 소나'에게 인터넷은 축복이다. 인터넷이 아니었다면, 종이책을 낸 적도 없고 등단 절차를 밟을 생각도 없는 내가 어떻게 생판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에게 손쉽게 말을 걸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면 꿈같은 일이다.
이제는 누구든 글을 쓰고 싶으면 글쓰기 자체에만 집중하면 된다. 내 글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내가 어떤 이력을 가진 사람인지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되었다. 글 자체만으로 승부를 걸 수 있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메시지가 있고,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문장력'이 있는가 하는 것뿐이다. 그것만 확실히 손에 쥐게 되면 당신은 이미 '작가'다. 다시 강조하건대, 지금은 '개나 소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다.
그러니까 당신도 써라!
1장. 글쓰기, 첫걸음 떼기
<블로그를 운영하라>
글쓰기야말로 한 개인의 경쟁력이자 문화지수를 높여주는 중요한 척도다. 글쓰기야말로 디지털 시대의 생존전략이 된 것이다. --한기호, [책은 진화한다] 중
한 사람의 '반골'이 작심하고 덤벼들면 당신의 사업체를 들었다 놓았다 하기는 일도 아니다.
'교양'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절감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교양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글'이다.
글을 잘 쓰느냐 못 쓰느냐는 그사람의 지성과 교양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있다. '잘 쓴 글'에 대한 평가 기준은 글을 읽는 사람마다 다르다. 정확한 문장력을 중시할 수도 있고, 자유로운 개성 표출에 높은 점수를 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잘 쓴 글'과 '못 쓴 글'은 대체로 구분이 된다는 것이다. 글을 잘 쓰기 위한 연습법은 간단하다. '잘 쓴 글'의 특징은 따라 해 보고, '못 쓴 글'에 드러난 실수는 철저히 피하면 된다.
당신은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가? 친목 도모나 일기장으로 사용하는 블로그 말고, 일관된 테마에 맞춰 관련 글을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그런 블로그 말이다. 아직 없다면 하나 개설하자. 너무 거창한 테마를 잡는 것은 삼가자.
블로그를 오래 지속하려면 운영자와 방문자 사이에 지식과 정보의 격차가 있어야 한다. '권위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운영자가 방문자보다는 해당 주제에 관해 하나라도 더 많은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남들보다 이것만큼은 더 많이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주제에 관해서만 한정해서 글을 올리는 게 좋다.
편집에도 최대한 신경을 써야 한다. 이때 선택의 기준은 가독성이다. 독자의 마음에 들도록 꾸며라. 본문은 나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독자를 위한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블로그를 운영할 때 유의할 점은 '꾸준히'지속하라는 것이다. 최소한 5년 정도는 내다보고 블로그를 운영해야 한다. 언터넷 세상은 생각보다 넓지 않다.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5년 정도 꾸려 나간다면 당신의 독자에 포함될 만한 사람들은 적어도 한 번쯤은 당신의 블로그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당신이 쓴 글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인지도는 서서히 높아질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서서히' 진행되는 일이야말로 믿음이 간다. '기간의 권위'를 확보하라.
<우선은 한 사람만 생각하라>
독자층을 넓게 잡으면 글의 힘이 떨어지게 된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 글을 읽고 다소 불쾌해할 사람도 있겠거니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껄끄러운 기분을 참아 내야 한다. 지나치게 광범위한 독자층을 의식해서 유보 조항을 줄줄이 달아 가며 쓴 글은 축 늘어지고 재미가 없다.
세상을 움직이려 하지 말고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라. 그러면 세상이 움직인다. --배우 송강호
기획서든 뭐든 글을 쓸 때에는 구체적으로 한 인물을 정해 놓고 그를 위해서 쓰라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그가 흥미를 느낄 법한 부분은 강조해서 쓰고, 시큰둥해할 것 같은 부분은 짧게 쓰거나 생략한다. 내 글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가 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머릿속에 두고 있는 그 인물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사람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지 않을까 하는 확신을 갖는다. 명심하자. 지금은 '미니미디어 시대'다!
<하나가 열을 불러들인다>
한마디로, 만인에게 사랑받길 원한다면 그 누구로부터도 진정으로 사랑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머릿속에 한 사람(그것을 꼭 들어 주었으면 하는 사람)을 정해 놓고 그에게 들려준다는 기분으로 연주를 하면 좋다.
"내가 뭘 해도 받아줄 것 같은" 사람과 "내가 뭘 해도 날 싫어할 것 같은"사람, 이렇게 두 부류의 관객을 상정하고 영화를 만든다. -- 김태용 감독
"아무 데로도 향하지 않고" 혼자서 독백하는 듯한(나는 순전히 내 만족을 위해서 글을 쓴다!) 글쓰기로는 열렬한 독자 한 명도 얻기 힘들다. 누군가를 향해 글을 쓰되, 그 대상은 몇 명 이내로 한정해야 한다.
나는 좋은 글을 쓰는 일이 연애편지를 적는 일과 결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김영하, 이우일
<'나만의 언덕'을 쌓아라>
작가 한승원은 "언덕씨름을 하면 이긴다."라고 말한다. 즉, 자기가 유리한 지점에서 승부를 해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작가 한승원은 자신의 고향인 장흥 대덕도라는 섬과 그 연안 바다를 작가로서의 가장 유리한 승부처로 최대한 활용하여 뜻한 바의 성과를 얻어내고 있다. -- 전상국, [소설 창작 강의]
싸움에서 지기 싫으면 남의 '언덕'근처엔 얼씬도 하지 마라.
나는 '글쓰기'를 내 언덕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사실 나도 '글쓰기'외에 따로 써 보고 싶은 주제가 많다. 그러나 지금은 참고 있다. 내가 원하는 높이만큼 '언덕'이 쌓였다고 판단되면, 그때 가서 다른 주제에 관한 글도 쓸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아니다.
<'옷'이 아니라 '피부'다>
내가 쓴 '책'을 파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파는 것이다. 독자들이 당신이라는 '인간 자체'에 흥미를 느끼게끔 글을 써야 한다. 해당 주제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 해당 주제에 대한 당신의 견해가 궁금해서 읽게 만들어야 한다. ... '내가' 썼다는 이유만으로 읽기를 원하는 독자를 확보하도록 노력하라. '야구'에 관한 내 글은 읽지만, '재즈'에 관한 내 글을 읽지 않는 독자는 내 팬이 아니라 야구 팬이다.
꾸밈없이 정직하게 쓰면 그게 곧 당신의 문체다. 누구나 자기만의 독특한 말투가 있듯이 '글투'도 있다. 이태준도 '글짓기'가 아니라 '말짓기'를 하라고 조언했다.
글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은 마음이요 생각이요 감정이다.
이제부터의 문장작법은 글을 죽이더라도 먼저 말을 살리는 데, 감정을 살려놓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 이태준, [문장강화]
하지만 '글'은 생판 얼굴도 모르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쓴다. 그들에게 닭살 돋는 걸 참아 가며 당신의 글을 읽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체는 '옷'이 아니라 '피부'다. 피부는 옷처럼 갈아입을 수 없다.
'퍼스널 브랜드'도 함께 팔아야 한다. 그래야만 고정 독자가 생긴다. 고정 독자를 가진 작가만이 진짜 작가다. 내 글이 좋아서 나도 좋은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내 글도 좋은 독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내 인품과 개성을 글로써 십분 드러내야 한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문체를 개발하고 일관성을 유지하라. 그렇다고 억지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당신의 말투가 곧 당신의 문체다. 말하는 것처럼 글을 써라. 말할 때 쓰지 않는 표현은 글에서도 쓰지 마라. 그것만 지켜도 당신만의 문체가 만들어질 것이다. 당신은 이미 당신의 문체를 가지고 있다.
<편견도 매력이 될 수 있다>
매력적인 편견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반드시 소수자의 편견이어야 한다. 다수자의 편견은 그 어떤 경우에도 매력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또한 편견은 제거가 아닌 관리의 대상이다. 제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걸 아는 게 자신은 편견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독선을 예방하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강준만, [대학생 글쓰기 특강]
편견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자신이 편견덩어리임을 자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보와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 '편견'을 '상식'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돼요?"
나의 편견은 상식이고, 너의 편견은 몰상식이다. 나의 편견이 몰상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글을 쓸 때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단어들이 있다. '객관적'이라는 단어도 그중 하나다.
통계 자료나 그래프를 제시하며 말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데이터들도 어쩔 수 없이 작성자의 강한 주관이 들어가 있게 마련이다.
'이즘'이란 '모든 개념 중에서 최상위의 위상을 갖는 개념' 또는 '거대한 체계를 갖는 개념"을 뜻한다.
단순히 정보를 얻을 목적이라면 굳이 당신의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된다.
인터넷 시대에는 정보의 접근성에서 작가와 독자의 격차가 거의 없다.
따라서 독자에게 당신의 글을 읽게 하려면 정보 제공만으로는 안 된다. 그에 대한 당신의 주관적인 생각도 함께 드러내야 한다. 편견을 '제거'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을 '관리'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된다. 당신의 편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라.
어떻게 하면 나의 편견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편견'으로 받아들여질까를 고민해야 한다. 물론 쉽지만은 않다. 자칫 잘못하면 구설에 올라 필화를 겪게 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와 같다. 그러나 작가가 쓰면서 스릴을 못 느끼는 글이라면 독자도 읽으면서 재미를 못 느낀다. 머릿속에서 '객관적'이라는 단어는 지워 버려라. 독자는 당신의 편견이 듬뿍 담긴 주관적인 글을 원한다.
<이것만 읽지 말고 저것도 읽어라>
한 권 정도라면 남의 글을 읽지 않아도 쓸 수 있다. 하지만 '장사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반드시 많은 글을 '폭식'해 볼 필요가 있다. 남의 글 읽을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내 글 한 자라도 더 쓰겠다는 생각으로는 10년을 써도 필력이 늘지 않는다.
물론 우선순위로 따지면 쓰기가 읽기보다 훨씬 중요하다. '폭식'을 하되, 읽는 시간이 쓰는 시간에 지장을 줄 정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중간에 집어 던질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일단은 '많이' 읽을 수 있다. 열 권을 읽으면 그중에 한 권 정도만 정독할 만한 책이었다. 그 아홉 권을 읽었기에 마음에 꼭 드는 한 권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변영주 감독은 국악을 안 좋아한다는 자신의 말에 임권택 감독이 "게으르기 때문이다"라며 핀잔을 주자, 그날 이후 석달 동안 내리 국악만 들었는데, 그러다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가야금을 좋아하고 꽹과리는 싫어한다는 것을... 변영주는 이러한 현상을 '취향의 확산'이라고 말한다. 싫어하는 것 속에도 좋아하는 것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이것저것 다 느껴봐야 한다는 것이다.
'폭식'으로 '취향의 확산'을 경험하라.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
30년 동안 독방에 갇혀서 소설만 읽은 사람은 소설을 쓸 수 있다. 100가지 일을 경험해도 그동안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결코 소설을 쓰 수 없다.
실생활의 경험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소설을 읽은 경험이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말이다.
"독창성이란 다른 텍스트들과의 완전한 결별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독창성'을 운운하려면 적어도 남들이 지금까지 그 분야에서 어떠한 성과를 이루어 왔는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한창 부지런히 글을 써야 할 시기에 독서만 하고 있는 소설가 지망생도 많기 때문이다. 쓰는 것은 어렵고 읽는 것은 쉬우니, 소설 공부 핑계 삼아 계속 읽어 대기만 하는 것이다. 아주 좋지 않은 습관이다.
그런데 책을 많이 읽다 보면 나 혼자 스스로 했던 생각을 이미 누군가 엇비슷하게나마 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결국 나는 책을 많이 읽지 못한 나의 게으름을 나의 독창성으로 착각한 셈이다. -- 강준만, [글쓰기의 즐거움]
꾸준히 책을 읽으면 언젠가는 자의식을 느끼지 않으면서 열심히 글을 쓸 수 있는 어떤 지점에 이르게 된다.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2장, 글쓰기를 위한 몸 만들기
<금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소설은 곧 노동의 산물인 까닭에, 엉덩이가 가벼우면 볼 장 다 본다. 의자와 찰떡궁합을 이루어 은근과 끈기로 버티는 힘이 우선 당차야 한다. 그래야 무엇이 나와도 나온다고 믿는다. -- 최일남,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
한번 의자에 앉으면 서너 시간은 괴로움 없이 죽치고 앉아 있는가, 아니면 30분도 앉아 있기 힘들어 몇 번이나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는가. 전자라면 작가가 되기에 아주 유리한 기질을 타고난 것이다.
글쓰기 능력도 다르지 않다. 글은 '재능'만으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능'을 익히지 않으면 결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내 생각에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재능'은 20, '기능'은 80 정도 필요한 것 같다. 그런데 직접 글을 써 보지 않으면 '기능'은 결코 한 뼘도 늘지 않는다.
첫 단어부터 시작해서 단어들을 하나씩 계속 붙여나가는 게 바로 글쓰기다. 글쓰기는 앉아서 하는 작업이다. 정말 다행이 아닌가? 앉아서 하는 더 나쁜 일도 있으니 말이다. --스티븐 테일러 골즈베리, [글쓰기 로드맵 10]
<명절에도 나는 일해>
나는 농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서인지 일이 있건 없건 규칙적으로 책상 앞에 앉는 편입니다. 정확하게 앉으려고 하는 편이지요. --성석제, [벼는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매일 규칙적으로 책상 앞에 한 시간 이상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어야 한다.
내가 지금도 매일 일하거든. 명절 때도 나는 일해. 설 때도 아침에 자식들 세배만 받고 바로 시나리오를 쓴다. 지금 영화할 시나리오가 서른 권은 넘어. 젊은 사람들 분발해야 돼. --김기영 감독
일하지 않을 때는 아예 아무것도 안 쓴다. 다만 그렇게 완전히 손놓고 있는 동안에는 늘 안절부절 못하고 잠도 잘 오지 않아서 탈이다. 나에게는 일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중노동이다. 오히려 글을 쓸 때가 놀이터에서 노는 기분이다. 글을 쓰면서 보냈던 시간 중에서 내 평생 가장 힘들었던 세 시간도 나름대로 꽤 재미있었다. -- 스티븐 킹
작가란 오늘 아침에 글을 쓴 사람이다. --로버터 진 브라이언트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그리고 규칙적으로, 기계적으로 글을 쓰는 경지에 다다를 때야 참된 소리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글은 익혀서 쓰는 것이 아니라 꽉 짜인 우리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삐져나오는 돼지의 살을 자르듯이 잘라 내야 하는 것이다.
-- 이효인, [영화여 침을 뱉어라]
글이라는 건 '규칙적'으로 '기계적'으로 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책상 앞에 앉아야 한다. 당신이 하루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한 시간도 안 된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이 지금 배워야 할 것은 글쓰기가 아니다. 한 시간 동안 엉덩이를 붙이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읽고, 베끼고, 쓰고>
"당신도 해봐. 나이 80이 되어도 연습하면 할수록 늘어" --80살에도 매일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 바이올리니스트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들의 공통점은 연습 과정 자체를 즐길 줄 안다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세상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하루 세끼 굶지 않기 위해 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전부 피할 수 '있는' 일들이다.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 만약 독서나 필사와 같은 습작 과정이 전혀 즐겁지 않다면 작가가 되려는 생각은 아예 접는 게 좋다.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는 말이다. (주 : 이 의견엔 반대다. 때로 즐겁지 않더라도 긴세월이 지나 어느정도 시기가 지나면 또 즐거워지기도 하더라. 모르지, 그땐 이미 늦었을지도. 그러나 자신이 즐겁다면 늦은 때란 없는 거 아닌가.)
연습하면 할수록 실력이 는다는 것을! 글쓰기 연습도 마찬가지다. '읽는다->베낀다->쓴다'라는 단순한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조금씩 필력이 늘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느낀다. 그 맛에 습작을 하는 것이다!
'읽고 베끼고 쓰는' 단순한 과정이 지겨운 사람은 작가보다는 적성에 맞는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낫다. (주 : 이 의견에도 반대다. 그 이유는 위와 동일한데,,, 20년 전만 해도 나자신 절대 베낄 수 없는 성향을 갖고 있었고 무지 지겨웠다. 정말 몇자 베끼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팔만 안 아프면 반나절은 베낄 수 있다.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사소한 방법들에서 변화를 가져오는 존재기도 한듯. 물론 큰 기둥은 바뀌기 힘들다에 동의하지만...)
'작가'는 별다른 목적 없이 '읽고 베끼고 쓰는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 택할 직업이다.
<'질'보다 '양'이 먼저다>
나는 한 달에 노트 한 권은 채우도록 애쓴다. 만약 매달 25일이 되었을 때 노트가 다섯 장밖에 채워져 있지 않다면, 나는 나머지 5일 동안 전력을 다해 나머지 노트를 꽉 채우고야 만다. --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이 연습을 할 때 주의할 점은 글을 쓰면서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저 생각에 떠오르는 문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 적기만 하면 된다.
한 장(두 쪽)을 쓰는 데 보통 20분쯤 걸린다. 매일 20분씩 이 훈련을 빼먹지 않고 하는 사람은 정말 '의지의 한국인'이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걸 보는 어미와 자기 논에 물 들어가는 걸 보는 농부와 책꽃이에 연습 노트가 늘어나는 걸 보는 작가 지망생의 심정은 같은 것이다. 물론 그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는 대부분이 '쓰레기'일 수 있다. 그러나 신경 쓰지 마라. 지금은 그저 노트를 불려 나가는 일만 생각하라.
일 년 정도를 묵묵히 실행해 보자. 그렇게 해서 일 년 후에 열두 권의 노트가 눈앞에 놓여 있게 되면 당신은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엔 뭘 하지? 손에 빨간 펜 하나를 쥐고 열두 권의 노트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는 거다. 그렇다. 민망할 것이다. 그래도 꾹 참고 찬찬히 읽어 보자. '이 대목은 괜찮네!' 하는 부분이 반드시 보일 것이다. 노트 한권에 한 장일 수도 있고, 한 단락일 수도 있고, 한 줄일 수도 있다. 그런 부분이 보이면 밑줄을 치자.
노트를 채울 때에는 글을 쓴다는 생각보다는 친구와 수다를 떤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좋다. 떠들다 보면 할 말이 생긴다.
"저한테 시나리오 작가의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까?"
"나도 몰라. 네가 1만 신 정도 쓰고 나면 너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거야." --심산의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
(주 : 1만신 = 대략 시나리오 80편 또는 드라마 60분물 대본 120편 정도. )
당신은 연습 노트를 50권쯤 가지고 있나요? 하루에 20분만 투자하면 4년 만에 채울 수 있는 양이다.
일주일에 원고지 30장도 쓰지 않으면서 어떻게 책이 나오길 바라는가? -- 명로진, [인디라이터]
(주 : A4 6장?)
<쌀통에 쌀부터 채워라>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영감이 오기를 기다린다면, 정신이 번쩍 들 만한 통찰력을 기대한다면, 당신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작가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다.
일단 써라. 글을 쓴다는 물리적 행위 자체가 상상력을 해방시킨다.
머릿속에 흐르는 말들을 멈추지 말고 손가락의 움직임을 통해 흘러나가도록 해라.
나는 당신의 '머리가 아닌 몸이 변하기를 바라며' 글을 쓰고 있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데 가장 큰 적은 '완벽주의'다. '완벽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쓰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아는 작가 지망생이 의외로 많다. 필요한 자료는 모두 구해서 책상 옆에 쌓여 있어야 하고, 쓰려는 글의 개요와 목차는 미리 짜여 있어야 하고, 너저분한 책상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하고... 그러나 정작 준비를 끝내고 나면 글을 쓰고 싶은 욕구는 덩달아 끝나 버리게 된다.
'생각'도 글을 쓰기 위한 준비 단계에 포함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래선 안된다. 글을 생각의 결과물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버려라. 생각은 글을 쓰면서 하라. 말을 할 때는 다들 생각과 동시에 입술도 움직이면서, 글을 쓸 때는 왜 생갹을 다 끝내고 손가락을 움직이려 하나. 오늘부터는 그러지 말자. 노트나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고 생각하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을 더하고 빼는 일 없이 재빠르게 글자로 바꾸어라. 이렇게 생각을 글로 바꿔 놓으면, 그 글이 다시 나의 시야로 들어와 뇌를 자극해서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작가와 작가가 아닌 사람의 차이점은 딱 하나다. 펜을 손에 쥐고 생각하느냐 안 그러느냐의 차이뿐이다.
물론 지면에 생각을 쏟아 놓는 일은 글쓰기의 1단계일 뿐이다. 2단계와 3단계가 아직 남았다. 그러나 1단계가 없으면 2,3단계도 없다. 쌀이 있어야 밥을 지을 것 아닌가. 진밥이 될까 된밥이 될까 하는 고민은 나중에 해도 된다. 일단 쌀부터 들여놓고 나면 그 후 자질구레한 고민은 그저 행복한 고민일 따름이다. 쌀통(노트)에 쌀(글)부터 채울 궁리를 하라. 쌀 속에 돌도 들어 있고 쌀벌레도 들어 있을 수 있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돌은 골라내고 벌레는 잡으면 된다. 돌 없고 벌레 없는 쌀을 구해야 한다고 '백날' 걱정만 하고 있어 보라. "그런다고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손가락으로 사유하라>
글은 생각 없이 써야 한다. 즉, 글은 손으로 써야 한다. 손이 머리에 복종하고 만다면 글에는 반드시 어떤 억지가 끼어들기 시작한다. 손 안에서 머리가 들어 있어야 한다. -- 이왕주,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쓰면서 자신의 글을 분석하거나 평가하지는 마라.
펄떡펄떡 살아 있을 때 잽싸게 꺼내라. 참신한 글이란 '쓰기 전엔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글'이다. 글쓰기는 단순히 생각을 '확인'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렇다면 글쓰기만큼 지겨운 일도 없다. 글쓰기의 진정한 즐거움은 '발견'에 있다. "당신은 당신이 쓴 글의 작가가 아니다. 최초의 독자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지금 당장 책상 앞에 앉아서 써라. 혹시 아는가? 오늘 저녁에 정말 내 생애 최고의 한 페이지를 쓸 수 있을지? 써 보기 전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내 머리도 모른다!
<'재능'보다는 '땀'이 소중하다>
문장이 못 따라가니까 이야기나 아이디어가 스스로 억지를 불러들여서 그래. 생각을 쫓아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생각을 명료하게 만들어 가는 경지를 터득해야겠지. 글이 생각을 불러들인다는 걸. -- 김원우, [벙어리의 말]
'자신의 '재능'에 대한 의구심은 오늘 날짜로 접자. 당신은 분명 글쓰기 재능이 있다.
세상 어디에도 타고난 재능만 가지고 성공할 수 있는 분야는 없다. 그 분야에서 밥 벌어먹고 살기 위해 요구되는 특정한 기술을 반드시 익혀야 한다. 작가 지망생에게 요구되는 단순 기술은 문장력이다. 문장력의 향상은 흘린 땀의 양에 비례한다.
<'보는 것만 고수'가 되지 마라>
하루 일과를 보내면서 작가 지망생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가 뭔지 아는가? 몸의 컨디션이 가장 좋은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이다. 컨디션이 최고일 때는 글을 써야 한다.
"작가란 오늘 아침에 글을 쓴 사람이다." 독서를 글을 쓰지 않은 '알리바이'로 삼지 마라.
책 한 권 읽을 시간이 생기면, 그 시간에 A4 한 장짜리 글부터 써야 한다. 글을 다 써 놓고 시간이 남으면 그때 책을 읽어라. '쓰기'와 '읽기'의 우선순위를 뒤바꿔 보낸 세월만큼 당신이 작가가 되는 날은 현재에서 멀어진다.
3장, 글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베끼기부터 시작하라>
정말 개성 있는 인간이 되고 싶으면 많은 외부적 경험을 내 안에 축적해야만 한다.
모방을 두려워하는 정신에선 창조성도 기대하기 여렵다. 모방을 두려워하는 태도에 이미 창조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못 잡는 무지함이 드러나 있다.
<아는 만큼 정직하게 써라>
당신도 독자에게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해야 한다. 글쓰기가 그래서 힘든 거다. 글 쓰는 과정 자체의 스트레스는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니다. 그보다 더한 고통은 '내가 정말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는가?' 하는 회의가 자꾸 든다는 거다. 예를 들어 보자. 남녀평등에 관한 글을 쓰려고 하니, 집에서 설거지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환경 문제에 대해 쓰고 싶은데,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직장을 자가용으로 출퇴근한다. 정부의 무능함에 대해서 논하고 싶지만, 지난 선거 때 투표를 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자기 검열을 해 나가다 보면 결국 떳떳하게 쓸 수 있는 소재는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독자에게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내가 실천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히 입을 다무는 것이다. 둘째는 그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싶으면 스스로 자격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말(글)과 행동에 괴리가 있으면 남들이 지적하기 전에 스스로 창피함을 느껴야 한다.
정직에 대한 강박, 자기 검열에 대한 집착, 언행일치에 대한 엄격함 등을 갖출 자신이 없으면 다른 직업을 알아보는 게 좋다. 타인을 향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아도 되는 직종은 무수히 많으니 그런 분야를 찾아가면 된다. 안철수의 말을 살짝 바꿔서 글쓰기 지침으로 삼자. "독자에게 정직해지는 법은 간단하다. 그것은 지킬 수 있는 말만 하는 것이다."
<경험이 없으면 쓰지 마라>
일상의 자잘한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므로 "저는 글로 쓸만한 에피소드가 없어요. 날마다 집과 직장(학교)을 왔다 갔다 반복할 뿐인걸요"라는 핑계로 글쓰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경험을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학의 다리가 길면 잘라라>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하라. 한 문장이 길어질 것 같으면 두 문장으로 쪼개라. 쉼표를 써서 두 문장을 한 문장으로 연결하지 마라.
누누이 강조하지만,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 중심주의'다. 글쓰기는 당신이 펜을 놓는 순간 끝나는 게 아니다. 독자가 당신이 쓴 글을 읽고 이해해야 비로소 끝난다. 그런데 독자가 당신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건 당신이 글을 잘못 썼기 때문이다. ... ... 내가 올린 글과 '핀트가 맞지 않는'댓글이 달리는 것이다.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찬찬히 읽어 보라. 분명히 어딘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만한 부분이 있다. 이런 오해는 '장황하게' 늘어져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간결하게' 썼다면 겪지 않았을 일이다. 비문을 피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단문으로 쓰는 것이다.
<절반은 전체보다 낫다>
무의미한 문장을 더 써넣는 것보다 차라리 좋은 문장이라도 문맥상 거슬린다면 과감히 잘라내는 편이 훨씬 낫다.
<형식에 복종하라>
언뜻 생각하기에는 "네 마음대로 써 봐라."하고 자유롭게 쓰도록 내버려 둘수록 개성 넘치는 글이 나올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형식적으로 바짝 제한을 두면 그것을 돌파해 나가는 과정에서 창의적인 글이 나오는 것이다.
나도 글을 쓸 때 형식을 고려하면서 쓴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혹시 눈치채지 못했는가? 내가 쓴 글은 대부분 한 단락의 분량이 비슷하다! 나는 이 책을 쓰기 전에 한 단락의 분량을 미리 정했다. 나는 그렇게 '형식상에 제한'을 두고 글을 쓰고 있다. 이는 무척 피곤한 일이다. 글을 '자연스럽게' 쓰다 보면 내가 원하는 만큼의 분량이 되지 않아도 행갈이를 해야 할 경우가 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한 단락의 분량을 일정하게 채워야만 다음 단락으로 넘어간다. 나의 이런 강박 증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글쓰기 초짜다. 글의 형식미에 대한 감이 아직 없는 것이다.
내가 단락마다 분량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독자에게 정돈되고 안정감 있는 느낌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내 글을 읽고 깔끔하다는 느낌을 받은 독자가 있다면 나의 형식적 실험은 성공한 것이다. 당신은 당신만의 방식으로 '형식상에 제한'을 두면 된다.
예컨대 영화 리뷰를 써서 블로그에 올리더라도, 반드시 '원고지 10매' 분량에 맞춰서 써 보는 거다. 9매도 11매도 안 된다. 딱 10매다! 형식에 복종하는 글을 써라.
<원고를 나누면 원고가 나온다>
매일 밤 원고지 20매를 목표로 써 나아가면 40일 만에 장편 1편 (원고지 800매)을 쓸 수 있다.
즉 원고를 나누면 언젠가 원고가 나온다는 말이다.
일관된 주제 아래 엮어 낸 원고가 최소한 책 한 권 분량(원고지 800매 이상)은 되어야 작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되고 싶으면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800매 분량을 채울 수 있을 만큼 잘 아는 분야(언덕)가 있어야 한다.
둘째, 책상에 앉아 실제로 800매를 써야 한다.
초짜인 당신에게 딱 적당한 량은 "매일 2매"다. 글의 한 단락이 원고지 2매다. 그러니까 당신은 하루에 한 단락만 쓰면 된다.
자신이 수영 선수라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보라. 400미터를 수영하는 박태환은 50미터씩 '구획'지어 생각하고 수영할 것이다. 당신도 800매를 생각하지 마라. 그저 오늘 써야 할 2매만 생각하라.
40일에 들어오든 400일 만에 들어오든, 들어오기만 하면 모두 성공이다.
<오늘 쓸 양만 생각하라>
"소설을 쓰는 것은 밤에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 당신은 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춰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앤 라모트, [글쓰기 잘쓰기]
머리보다는 손가락을 믿어라. 글쓰기는 순간적인 선택의 집합이다.
작가의 통제를 거부하며 스스로 움직여야 좋은 글이다.
너무 멀리 보지 마라. 다만 오늘 할 일인 '몇 단락 쓰기'에 집중하라. 나는 하루에 두 단락 정도 쓴다.
매일 '한 페이지'씩 꼬박꼬박 쓰겠다! 한 페이지가 버거우면 '한 단락'이라도 쓰겠다! 한 단락이 안 되면 '한 문장'이라도 쓰겠다!
필력이 붙을수록 한자리에서 쓸 수 있는 글의 양은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소설을 집필할 때의 심리 상태 조절에 대해 말한다면, 그날 써 나갈 노동력이 커버할 수 있는 부분보다 먼 곳을 보아서는 안된다. --오에 겐자부로, ['나'라는 소설가 만들기]
<인용도 실력이다>
우선 글쓰기에 임하는 자세에 있어서 '창작자'가 아닌 '편집자'가 되길 권하고 싶다. 윤리적이고 겸허한 편집자의 자세를 갖게 되면 당연히 많이 읽고 생각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강준만, [글쓰기의 즐거움]
반드시 글 한 편에 최소한 인용문 하나를 집어넣도록 하자. 첫째, 그래야 독서를 한다! '시간 죽이기' 독서는 이제 좀 줄이자. '목적 있는'독서를 해야 한다. 둘째, 글이 덜 지루하다! 웬만한 필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자기 문장만 가지고 독자의 눈길을 내내 붙들고 있기는 힘들다. 셋째, 그래야 내가 써야 할 분량이 줄어든다!
'책읽기', '글쓰기', '아이디어' 이렇게 세 개의 키워드는 항상 내 머릿속에 박혀 있다. 그다지 관련 없어 보이는 책을 읽다가 내게 꼭 필요한 인용문을 찾기도 한다. 그리고 이처럼 엉뚱한 책에서 찾은 인용문이 더 재미있을 때가 많다.
나만 할 수 있는 인용이 많을수록 글이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당신도 이제부터 당신만의 키워드를 가지고 독서를 하라. 그렇게 인용할 글이 어느 정도 모이면, 그중에서 또 서로 관련 있는 것들을 두세 개씩 묶어 순서별로 배치해 보라. 이 정도만 사전 준비가 되어 있어도 글쓰기에 대한 갑갑증은 훨씬 줄어들게 된다. 적어도 마른행주를 쥐어짜는 기분은 아닐 것이다.
<정답은 하나뿐이다>
눈으로 스쳐지나가는 어휘를 시각적 어휘라고 한다. 이 시각적 어휘들은 읽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며, 반복적인 단어가 나올 때마다 점차 머릿속에 이해가 되는데 이런 이해된 어휘들을 우리는 비로소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 신규철, [한국인을 위한 자동화 영어학습법]
당신은 (사전이 아니라) 다른 작가들이 쓴 글을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그냥 읽지만 말고 옆에 펜과 노트를 준비해라. 마음에 드는 단어와 어구를 골라 노트에 옮겨 적어라. 기왕이면 단순히 옮겨 적지만 말고, 그 단어나 어구를 이용해 예문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다. 이런 식으로 가능하면 매일 30분쯤 투자해서 '나만의 어휘 사전'을 만들어라. 이 노트에는 당신이 직접 써먹을 수 있는 '활용 어휘'만 담으라는 것이다.
4장,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사소한 실수는 사소하지 않다>
글쓰기에서 사소한 실수는 더욱더 사소하지 않다.
소설 쓰기는 지극히 정밀한 노동이어서,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 쓰기를 게을리 하면 안 된다. 단어 하나를 소홀히 하면 담 전체를 소홀히 하는 셈이다. 요즈음 세상에서는 빈틈없고 꼼꼼한 작은 구석들이 승부를 결정짓는다.
-- 안정효,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가장 좋은 것은 조금씩 찾아온다. 작은 구멍으로도 햇빛을 볼 수 있다. '작은 일일수록 더없이 중요한 일이다.'
-- 안상헌, [내 삶을 만들어준 명언노트]
바위는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쉽게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조약돌은 그렇지 않다. '도토리' 한 개 정도는 그래도 봐줄 만하다. 그러나 '도토리' 두 개는 곤란하다. (주 : '도토리 키 재기'라는 속담을 훌륭한 두 사람을 빗대어 잘못 쓴 경우가 한 작가에서 두 번 나온 것을 말한다.)
<언어에도 불량품이 있다>
'워피안의 법칙'이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즉, '곱고 바른 말을 써야 곱고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지요. -- 나임윤경, [여자의 탄생]
언어가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자주 쓰는 표현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게 되었다. '숏다리'니 '얼큰이'니 같은 장난스러운 말이 누군가에게는 더 심한 비수가 된다. 차라리 상소리를 들었다면 대거리라도 할 텐데, 상대가 웃으면서 그렇게 놀리면 거기다 대고 화를 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피해를 당해야 비로소 언어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중국산'이라는 표현과 일본인들의 '조선커트'는 전혀 다를 바 없다.
민감한 언어 감수성은 작가로서 중요한 덕목이다. 작가는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글을 지키는 사람이기도 하다. 당신은 한국어의 소비자이자 생산자이다. 소비자로서 당신은 언어를 과소비해서는 안된다. 언어는 검소하게 사용해야 한다. 당신이 쓰지 않아야 그런 품목들이 시장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생산자로서 당신은 불량품인 언어를 만들어 내는 데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개념 있게' 말하고 싶으면 일단 자신이 쓰고 있는 용어의 개념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어설프게 아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적절한 말장난은 장난이 아니다>
말장난은 때로 간을 맞춰 준다. 하지만 말장난의 철칙은 '넘치느니 모자라는 게 낫다'는 것이다.
<상식은 상식일 뿐이다>
남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세상을 보는 다른 관점을 제시해야 한다.
상식 확인의 차원에서 글을 읽을 만큼 요즘 독자들은 인내심이 많지 않다. 남들과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글에 설득력이 없으면 결국 사기꾼(요샛말로 바꾸면 '낚시꾼')밖에 되지 않는다.
극소수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을 가지고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도록 글로 풀어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다.
<열 마디 말보다 한 마디 비유>
독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도 천하를 여행하게 해준다. --반철환, [책, 세상을 훔치다]
다른 작가들이 쓴 비유들을 모아서 따로 노트를 만드는 것이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수집할 필요는 없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비유를 만나면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가 나중에 노트에 옮겨 적으면 된다.
전혀 다른 두 개의 단어, 사물, 상황등을 놓고 공통점을 꼽아 보는 것이다.
<숫자의 힘은 위대하다>
자신의 관심사에 관한 책이나 잡지를 읽을 때 나오는 숫자는 꼭 수첩에 적어 두도록 하자. 열 마디 설명보다 하나의 숫자를 제시하는 것이 독자에게 더 강력한 설득력이 있다.
<제목이 얼굴이다>
아직까지 무엇을 주제로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미리 근사한 제목부터 지어 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글쓰기는 내가 정한 제목이 말이 되도록 논리적 일관성을 부여해 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무작위로 몇 개의 단어를 골라 합쳐 보라.
하루를 투자하여 책 제목을 100개 만들어 보라.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장난치듯 여러 단어를 조합해 보라.
아무 책이나 펼쳐 그 페이지에 있는 단어를 무작위로 고르는 것이 좋다.
<퇴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고안, 집필, 퇴고'로 볼 때, 4:2:4의 비율로 바뀌고 있다. 내 문장에 구토가 나오는 순간까지 고쳐보지 못한 글은 끝까지 후회가 되죠. -- 정여울, [미디어 아라크네]
Writing is rewriting.
물론 퇴고한다고 해서 초고의 많은 부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10퍼센트 미만이다. 그런데 그 10퍼센트를 꼼꼼히 퇴고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글의 질이 확연히 달라진다.
타짜는 글을 쓰고 나서 고민하는 시간이 길다.
보는 눈이 먼저 열려야 분별을 하게 되고, 눈에 격이 생겨야 그 격에 이르려고 부지런히 손을 익힐 것 아니냐.
-- 최명희, [혼불 4]
'안고수비'라는 표현을 알아 두자. 보는 눈은 높은데, 쓰는 손이 그에 미치지 못해서 괴롭다는 말이다.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겪는 게 낫다.
퇴고시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이 좋다. 그저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해도 된다. 초고를 쓰면 하루(한 달이면 더더욱 좋고)를 묵혀 두라는 것이다. 그자리에서 열 번 읽는 것보다 하룻밤 자고 한 번 읽는 게 낫다.
<작가는 '그저 직업'이 아니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라는 소설이 한창 읽힐 무렵으로 기억한다. 그 소설에 심취해 있던 한 후배가 어느 날 내게 물었다.
"제제가 커서 어떤 사람이 됐을 것 같아요?"
"작가가 됐을 거야. 그리고 사실 작가가 됐잖아?"
"전 뭐가 됐을까를 물은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됐을까를 물은 거예요."
난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작가가 그저 직업이라고 생각하니?"
-- 변정수, [상식으로 상식에 도전하기]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보자면 작가만큼 답이 안 나오는 직업도 드물다. 톡 까놓고 얘기해서, 작가가 과연 직업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다른 나라 사정은 모르겠고, 우리나라에 국한하여 보자면 말이다. 그런데도 작가 지망생의 수는 세월이 흘러도 줄지 않는다. 이는 '작가'라는 타이틀이 물질적인 만족감과는 다른 종류의 만족감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다른 만족감이 바로 '인정 욕구'다.
세상엔 수많은 직업이 있지만, 그중에 '나는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라는 고민까지 하게 만드는 직업은 그리 많지 않다. 작가는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직업이다. 그러니까 "나는 작가가 되겠다."라는 말 속엔 "나는 어떤 인간이 되겠다."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폴 오스터의 자전적 소설 [빵굽는 타자기]
<글쓰기 자체가 보상이다>
내가 관심을 가진 주제가 '우연히' 현재의 출판 트렌드와 맞아떨어지면 아주 손쉽게 책을 낼 수 있다.
즐겁지 않으면 글쓰기가 아니다. 당신이 책 발간을 목표로 글을 쓴다면 글쓰기가 결코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백 명 중에서 다섯 명 안에 포함될 확률은 무척 낮기 때문이다.
책을 내지 않아도 좋다는 사람만 계속해서 글을 써라.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5퍼센트 안에 못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는 아니다."
맺음말, 망설이지 말고 지금 당장 써라
매혹은 힘인 것이다. -- 김점선, [바보들은 이렇게 묻는다]
'매혹'은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조건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매혹'적이기만 하다면 기술적인 결함이나 부족한 완성도는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날 수 있다는 말이다. 심지어 그러한 단점들이 되레 '매혹'을 돋보이게 하는 경우까지 있다.
사람들은 하나의 장점에 '매혹'되면 나머지 단점은 눈감아 준다. 반대로 하나의 단점에 '꽂히면' 나머지 장점은 눈감아 버린다. 매력적인 작가가 되고 싶으면 기본적인 방법은 간단하다.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최소화'하는 것이다.
기성 작가는 쓰기 힘든 '개성' 강한 글을 쓰되, 미숙함이 드러나지 않도록 '문장력'을 갈고닦아야 한다.
쓰고 싶은 글이 있는데 문장력이 부족해서 지금은 못 쓰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망설이지 말고 지금 당장 써라! 아무도 초짜인 당신에게 기술적인 완성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잘 다듬어진 글을 읽고 싶으면 기성 작가의 글을 읽지 뭣하러 당신의 글을 읽겠는가. 작가 지망생에게 문장력을 기르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그것은 10년 후를 위한 투자이고, 우선 당장은 '매혹적'이고 '개성적'인 글을 쓰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가난한 영화에는 특유의 멋진 매력이 따라서 생긴다는 소리입니다. 오직 개성, 이야말로 가난한 예술가의 무기입니다. -- 박찬욱, [박찬욱의 몽타주]
읽는 분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쓰는 나는 무척 즐거웠다.
나는 이 책의 저자이자 최초의 독자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의 진짜 즐거움 아니겠는가.
부록1, 맞춤법과 띄어쓰기, 이것만은 알아두자
---이 부록만 보더라도 소장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자주 쓰는 표현들의 혼동할 수 있는 단락을 열거해 놓아 옆에 두고 글 쓸 때 찾아봐도 될 것 같다.
부록2, 외래어 표기, 제대로 알고 쓰자
(주: 정말 괜찮은 글쓰기 비법 책을 우리나라 사람이 썼다니,,,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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