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희 작가 “<성균관 스캔들>을 통해 자기 밖의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11월 2일, KBS <성균관 스캔들>이 종강을 맞았다. 남장을 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던 한미한 가문의 규수 김윤희(박민영)는 눈부신 청춘의 한 시기를 거치며 “배움이 향하는 곳, 나라의 시작은 바로 국민이다”라는 말에 담긴 답을 얻었고 정조(조성하)는 “이제 이 조선에서 그대가 새로운 꿈을 꿀 차례다”라고 말했다. 이상을 쫓는 젊은이들에 대한 초상은 자칫 한 발짝만 잘못 디디면 공허한 구호나 유치한 열정으로 그려지기 십상이지만 <성균관 스캔들>을 집필한 김태희 작가는 원작 소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매력에 품위 있는 현대에의 비유와 청신한 청춘의 풍경을 더하며 우리가 예상치 못한 새로운 그림을 그려냈다. 10주 동안의 짧았던 학기가 끝나기 몇 시간 전, <10 아시아>가 김태희 작가를 만나 물었다.
<성균관 스캔들>은 청춘 성장물, 정치사극, 멜로드라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읽히면서 시청자들의 반응 역시 여러 갈래로 나뉜 작품이다. 처음 방향을 설정할 때 어떤 고민을 했는지 궁금하다.
김태희 작가 : 시놉시스 작업에 들어가기 전 SBS <찬란한 유산>을 굉장히 재밌게 봤다. 가족극, 미스테리, 로맨틱 코미디, 전문직 드라마가 다 들어 있는 작품이었는데 나 역시 앞으로는 드라마가 하나의 장르만 다룰 수는 없는 시대가 올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한동안 청춘 드라마는 안 된다는 말을 많이들 했기 때문에 야심차게 시놉시스를 썼는데 정작 대본 작업에 들어가자 너무 어려워졌다. (웃음) 대본 안에서 톤 조절하는 것도 힘들었고, 감독님도 연출하시면서 이 작품의 장르에 대해 고민이 많으셨다고 들었다.
“유생들이 실제로 어떻게 공부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
<성균관 스캔들>이 방송되기 전까지는 대부분 ‘성균관에서 연애하는 이야기’를 예상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정치의 기본적 요소들을 깊이 파고들었다. 윤선주 작가와 공동집필한 KBS <대왕세종> 역시 영웅서사보다 정치사극의 측면이 강했는데 그런 지점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인가.
김태희 작가 : 사실 <대왕세종>에 참여할 때는 정치적 사안을 다루는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한글창제 같은 건 다들 아는 소재지만 조세개혁같이 복잡한 소제도 다뤘으니까. 그래서 ‘정치 사극을 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 작품을 시작했더니 성균관 자체가 정치를 배우는 공간이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냥 앉아서 “공자 왈 맹자 왈”만 할 수는 없으니, 성균관이라는 공간에서 제시된 주제를 가져가야 했다.
성균관에서의 짧은 한 시기가 아니라 입학과 신방례, 순두전강, 대사례 같은 학사 일정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이렇게 구성한 이유가 있었나.
김태희 작가 : 나 스스로가 드라마를 볼 때 원래 존재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공간이 새롭게 조명되는 걸 좋아하는데 이 기획은 특히 성균관이라는 공간이 중심인 만큼 제대로 잘 보여주고 싶었다. 신방례까지를 다룬 원작에도 다양한 풍속사가 잘 나와 있기 때문에 그걸 읽는 재미가 있어서 드라마에서 역시 잘 다루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 이후 공부를 하면서 대사례, 순두전강, 황감제 같은 걸 알게 되어 넣었고 원래의 시놉시스에는 분향례와 졸업식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치라는 주제를 다루는 데도 굉장히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배움’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어떻게 합리적인 토론을 배울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제도나 사상으로 발전시켜나갈 것인가 처럼 다소 관념적인 부분들에 대해 접근한다. 윤희가 걸오(유아인)와 정약용(안내상)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도 그렇고, 대본화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왜 그런 방식을 택했나.
김태희 작가 : 다른 길을 잘 몰랐던 거 아닐까. (웃음) 사실 나는 유생들이 실제로 성균관에서 어떻게 공부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 성균관의 커리큘럼에 따라, 첫 수업에서는 무슨 얘기를 했을까 같은 과정을 한번 씩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윤희 같은 경우는 이 아이가 성균관에 남아야 하는 동기를 강화하면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에 관심을 갖게 할 필요성을 느꼈고, 걸오와 정약용에게 윤희가 한 얘기도 그걸 고민하다 나온 내용이다. 가난한 집안의 여자로 당시 소외된 계층이었던 윤희가 소위 말하는 ‘먹물’들의 ‘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보통 남장여자 소재의 작품에서는 여자가 멋진 남자들만 있는 공간에 들어가 사랑받는다는 판타지적 설정이 중요했다면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윤희가 여성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다르게 본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초선(김민서)과 윤희의 첫 만남에서 윤희의 시선이나 대처 방식은 같은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김태희 작가 : 사실 나는 윤희를 통해 여성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약간 진부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내가 92학번인데 당시 고민했던 담론들을 너무 뒤늦게 꺼내는 건 아닐까 싶었고, 만약 이 작품을 2000년 무렵에 썼다면 오히려 그 지점에 훨씬 더 힘을 실었을 거다.
학생 때 전공은 뭐였나.
김태희 작가 : 신문방송학과였다. 어릴 때부터 드라마를 너무 좋아해서 아직도 30년 전에 본 드라마가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다. 하지만 작가 같은 건 나이 마흔 넘어서나 되는 건 줄 알았기 때문에 졸업하고 사내방송 일을 잠시 하다가 결혼 뒤에 드디어 드라마를 쓰기로 결심한 거다. 좋아하는 일이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봐야겠다고.
성균관 유생들과 비슷한 또래이던 대학 시절에는 어땠나.
김태희 작가 : 92학번으로서는 평범했지만 지금 대학생들과 비교해보면 안 평범할지도 모르겠다. (웃음) 하지만 정치에 대한 얘기를 넣은 건 내가 겪어서가 아니라 원작의 설정에 이야기를 채우다 보니 그런 거고, 사실 나는 386이 아니다. 우리 윗세대가 386이지. 드라마를 쓰면서는 정조와 정약용이 386이라 생각했고 잘금 4인방은 그렇지 않다고 봤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 ‘운동해야 된다’고 계몽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었다. 그런데 3,40대 주부들이 후반에 많이 합류한 데는 그런 영향도 있다고 들었다. 그 시절 자신이 화염병을 던졌던 안 던졌던 간에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던 20대 청춘 시절의 기류를 다시 느끼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감성적인 유아인 덕에 원작과는 전혀 다른 걸오가 나왔다”
김태희 작가 “캐릭터를 구상할 때 이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은 무엇일까를 본다.”
그렇다면 잘금 4인방을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생각하고 이끄는 듯한 정조라는 인물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궁금하다.
김태희 작가 : KBS <한성별곡-正>을 좋아하는데 내가 파악한 정조는 <한성별곡-正>에서 그려진 것보다는 좀 더 노회한 인물이다. 지난 해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어찰이 공개된 걸 보면 정국을 주도면밀하게 장악하려 했던 것 같고 그러기 위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용할 줄도 알았던 것 같다. 또 “탕평의 시대를 넘어 대동의 시대로 가겠다”는 말을 한 적도 있고 노비제도를 없애고 싶어한 것도 사실이라 정조가 죽은 해에 순조에 의해 공노비가 없어졌을 정도로 생각 자체는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계몽군주로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여기는 한계도 있었고, 나는 그 이중적인 면이 우리 시대 지식인과 나를 비롯한 기성세대가 많이 갖고 있는 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이십대는 억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들이 정조와 정약용에게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그게 20회에 처음 나오는데 그걸 조금 앞으로 당기고 깊게 다루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원작에서도 잘금 4인방의 캐릭터는 뚜렷하지만 성격이 조금씩 바뀐 드라마에서도 각각의 색깔이 분명하다. 캐릭터를 잡는 과정은 어땠나.
김태희 작가 : 요즘 이십대에게 연민을 느낀다. 나도 그 시절 힘들었는데 그들은 더 힘들 것 같고, 본인이 힘든 게 억울한지도 모를 것 같아서 안쓰러웠다. 그래서 윤희는 자기가 억울한 애면 좋겠다고 싶었고, 1회에서 “조선이 그렇게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했을 만큼 희망이 없던 윤희가 성균관에 와서 희망을 찾아가는 얘기를 하면 이십대가 조금 공감대를 갖지 않을까 생각했다. 선준(박유천)은 멜로의 남자주인공이니 내면적 변화를 주기 위해 ‘조선이 못마땅한 아이’ 윤희의 대척점에 ‘개인이 잘 하면 되지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는 아이’ 선준을 세웠다. 원작에서 제일 재밌던 부분은 선준이 초선이를 질투하는 대목이었는데 원칙과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인물이 남자를 좋아하게 되어 그런 상황에 빠졌을 때 갈등이 가장 부각될 것 같았다. 사실 원작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걸오인데 나는 그렇게 멋있고 거친 짐승남 캐릭터를 쓸 수 있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웃음) 그래서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말수가 적고 약간 감성적인 걸오가 내 손에서 나왔고, 두 번째로는 우리 유아인씨가 굉장히 감성적인 연기자기 때문에 원작과는 아주 다른 캐릭터가 탄생했다. 용하(송중기)를 중인으로 설정한 이유 역시 성균관이 다양한 계층이 모이는 공간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 여당인 노론, 야당인 소론, 중인 출신의 아이가 함께 모인 4인방이 됐다.
15부를 지나면서 그 전까지 못했던 이야기를 많이 넣으려는 의지가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호흡의 문제도 겪었는데 가장 아쉬웠던 점은 무엇인가.
김태희 작가 : ‘금등지사’라는 소재를 넣어서 후반부를 정리하며 너무 급하게 간 건 아닌지, 아예 없는 게 좋았을지, 아니면 회차를 늘려서 제대로 다루는 게 좋았을지 아직도 고민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다뤘다면 시청률이 또 떨어졌을 것 같기도 하고. (웃음) 내가 대본을 길게 쓰는 편이라 편집으로 잘린 부분에 금등지사에 관련된 내용이 많았다. 어쨌든 지금도 반성거리이자 다음 작품을 쓸 때 고민이 될 지점이다.
반면 드라마를 쓰는 입장에서 ‘금등지사’를 넣어야만 했던 이유도 있을 것 같다.
김태희 작가 : 남장여자라는 소재만으로는 임팩트가 부족할 것 같았고, 윤희가 여자라는 것이 밝혀진 다음의 긴장감을 무엇으로 가져갈지 고민했다. 그리고 금등지사는 원작 소설을 드라마로 옮기기에도 필요한 설정이었다. 예를 들어 소설 속 홍벽서는 다양한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드라마에서 그러면 잊혀지기 쉬우니까 홍벽서 라인과 주인공들을 엮어줄만한 게 필요했다. 또 ‘정조의 개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관련해 풀어갈 수 있는 게 있으면 드라마적으로 풍부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대사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인상적이었다. 고어체의 우아한 느낌과 유교 철학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는데 이는 장편사극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장점이었던 것 같다.
김태희 작가 : 어쩌면 이 작품이 나에게 오게 된 건 다른 이유 없이 사극의 현장에서 굴러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웃음) 처음 KBS <불멸의 이순신>에 보조작가로 참여할 때는 정말 너무 힘들었는데 윤선주 작가님의 긴 호흡을 따라가다 보니 익숙해진 것 같다. 예전에는 내가 사극을 한다는 것 자체가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달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무거운 등짐이 날개가 된다’는 말처럼 그 시간들이 많은 도움이 됐다.
주인공들 외에도 좌의정(김갑수)부터 유생 김우탁(장세현)까지 모든 등장인물이 자신의 언어로 자기 논리를 펼치며 존재감을 보였는데 캐릭터를 만들어나갈 때 어디서부터 접근하는지 궁금하다.
김태희 작가 : 이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은 무엇일까를 보는데,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건 사실 대사다. 시놉시스에 인물마다 붙였던 대사가 있는데 15강에서 선준이 윤희에게 “사내인 네가 좋다”고 하는 것도 캐릭터를 잡을 때 이 아이라면 이런 말을 할 것 같아서 넣은 거다.
“그 시대가 현재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를 찾는 것이 중요”
드라마 전체에 걸쳐 인생 수업을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 이선준은 특히 많은 변화를 겪은 인물이다. 그 변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김태희 작가 : 자기 밖의 세상. 부용화(서효림)에게 용하가 네 인생에서 네가 주인공이 아닐 때도 있다는 걸 인정하라고 하는 것처럼,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 밖의 세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게 힘들어서 이십대 때 힘들었던 것 같다. 성장이나 청춘은 그걸 깨달아가는 과정이고, 네 주인공 모두에게 해당되겠지만 선준은 자기 안의 세상이 공고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깨지는 모습이 더 드러나 보인 것 같다.
남장여자라는 소재에서 중요한 부분이 남자와 남자로 만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얼마나 설득력이 있느냐다. <성균관 스캔들>은 시대적 배경이 이선준을 짓누르는 무게감도 있지만 생경한 곳에 가까운 사람은 서로 밖에 없던 윤희와 선준이 동지애에 가까운 감정을 쌓아가며 사랑을 깨닫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MBC <커피 프린스 1호점>보다 오히려 <브로크백 마운틴>에 가까운 느낌이다.
김태희 작가 : 한 친구는 “옛날에 네가 데모하며 돌 던졌다고 모든 멜로 관계를 동지애로 보는 거 아니냐”고 하던데. (웃음)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닌데 윤희와 선준이는 서로 그럴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 같다. 예전에 어떤 분이 “마음을 여는 게 멜로드라마다”라고 하신 말씀을 좋아한다. 다음 작품에서도 성격을 좀 다르게 하더라도 마음을 여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다.
사극을 쓸 때는 사료에 접근하고 소화하는 것만 해도 만만치 않은 부분인 것 같다. 전작들에 참여하면서 생긴 노하우도 있을 것 같은데.
김태희 작가 : 사실 <불멸의 이순신>이나 <대왕세종>이나 윤선주 작가님을 도와드렸을 뿐 맨 땅에 헤딩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정말 엄청나게 다르다는 걸 느꼈다. (웃음) 그런데 누군가 어떻게 시작하는 게 좋겠냐고 묻는다면 박시백의 만화 <조선왕조실록>을 보라고 하겠다. 쉽고 간결하게 잘 쓰셔서 흐름을 빨리 읽을 수 있다. 고등학교 국사 참고서도 통사별로 정리되어 있어서 좋고 중고생을 위한 한국사 같은 개론서도 괜찮다. 시대나 주제를 정하면 출간된 관련서적을 모두 읽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나도 정조시대에 관한 역사서와 성균관에 관련된 논문은 다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고, 어쩔 수 없이 가는 부분이 있다. 중요한 건 그 사료들을 보면서 그 시대가 현재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를 찾는 거다. KBS <추노>의 천성일 작가가 “사극은 ‘어떤 시대를 쓰는지’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는 말을 한 걸 읽고 감탄하며 밑줄 그었다. (웃음)
그렇다면 <성균관 스캔들>이 현대와 맞닿은 부분은 뭐라고 생각하나.
김태희 작가 :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는 게 무책임하긴 하지만 본인이 희망이 있는 세상을 원한다면 자신부터 출발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윤희 캐릭터를 만들며 생각한 건, 이 아이는 왜 글을 잘 읽었을까, 분명 아버지가 공부하는 방 문 밖에 서 있지 않았을까, 그 때 손 시리다고 윤희가 포기했으면 어땠을까였다. 결국 출발은 포기하지 않은 윤희로부터였으니까, 문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정조 이후 조선 사회는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진보라는 것을 믿나.
김태희 작가 : 어려운 질문이다. (웃음) 사실 대학교 때 사회과학 학습을 하면서 선배들이 사회는 진보한다고 말할 때도 나는 절대 믿지 않았다. 지금 보이는 눈 앞의 현실이 더러워서 참여할 뿐이지, 과거와 달라진 건 농노가 월급노동자가 된 것 뿐인데 뭐가 진보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에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라는 책을 읽었다. 우리가 이봉창 의사라고 알고 있는 분에 대한 책이다. 이봉창은 젊은 시절 돈이 필요해서 일본에 건너가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인처럼 생활하지만 조선인이라는 걸 들켜 갖은 학대를 당한 뒤 김구 선생을 찾아가 일왕을 암살하겠다는 각오를 밝힌다. 주위에서는 일본 옷 입고 게다를 신은 사람에게 백성들의 고혈이 담긴 돈을 쓸 수는 없다고 하지만 김구 선생은 그를 믿고 폭탄 세 개를 주는데 이봉창이 성능을 한번 시험해 보자고 하자 안 된다고 거절한다. 그래서 이봉창은 거사를 앞두고 긴장된 마음을 풀기 위해 유곽에서 활동비를 탕진한 뒤 일왕 행렬을 향해 폭탄을 던지는데 그 첫 번째가 불발한다. 만약 예행연습을 해 봤다면 성공했겠지. 그래서 결국 그는 사형장의 이슬이 되지만 의거 소식에 감동받아 찾아온 윤봉길이라는 청년이 몇 달 뒤 상해 홍구 공원에서 뜻을 이룬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느낀 건 ‘이봉창이 한 일은 뭘까. 그가 한 일을 실패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역사는 실패를 통해 진보하고 발전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다음 드라마를 통해 다뤄보고 싶은 시대가 있다면.
김태희 작가 : 일단, 현대를 다루고 싶다. (웃음) 그리고 언젠가 일제강점기, 구한말을 다루고 싶다. 그 때 패배하지 않았던 인간들의 역사를 재미있게, 웃으면서 볼 수 있도록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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